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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오딜의 매혹

안시리움 이야기

by 정벼리

한 때 주에 이틀씩 열심히 발레 학원에 나갔었다. 꽤나 우아한 취미생활을 즐겼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발레 취미반의 문을 두드렸던 것은 고질병인 목 디스크 관리라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 임신 중에 산부인과에서 열렸던 태교 발레 수업을 들었었다. 신기하게도 거길 다녀오면 양 어깨 위의 반달곰 두 마리가 사라진 듯, 가뿐하고 머리가 맑아지곤 했었다. 지긋지긋한 목과 어깨 통증에서 해방되는 기분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출산 후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집 근처 성인 취미 발레반의 문을 똑똑 두드리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한층 더 굳어버린 불쌍한 내 목과 어깨는 발레를 배우면서 꽤 호전되어, 한동안 팔 저림의 존재를 잊고 살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소파에 쪼그리고 누워 TV를 보는 대신, 두 다리와 허리를 쭉 펴내며 바른 자세로 스트레칭을 해주니 뭉친 근육이 풀린다. 거기에 폴드브라*로 어깨와 팔, 등 근육을 섬세하게 단련시키면 어깨 위 반달곰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 폴드브라 : 앙바, 앙아방, 앙오, 알라스콩 등 발레의 팔 동작을 의미함


비록 나는 '목 통증 탈출을 통한 편안한 일상생활'이라는 지극히 현대인스러운, 매우 목적지향적 태도로 발레학원을 찾았지만, 그와 별개로 그곳은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밝은 조명이 내리쬐는 환한 연습실에 줄줄이 놓인 하얀 바는 물론이거니와, 대기실에 놓인 소파와 테이블마저 차분한 파스텔톤의 어여쁨이 깃들어 있었다. 테이블 가운데 화병에는 늘 싱그러운 생화가 꽂혀 있어 분위기를 더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대형 TV에서는 언제나 발레 공연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그냥 앉아있는 것만으로 힐링까지 누릴 수 있을 만큼, 정신없는 현실과는 살짝 유리된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우아한 한가로움이 거기 있었다. 나는 일부러 수업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그곳에 머무르기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하루, 잊히지 않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날도 조금 일찍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화면 속 발레 공연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백조의 호수였는데, 흑조 오딜이 등장하여 독무를 추고 있었다. 완벽한 기술과 절제된 춤선이 신비로운 매력을 빚어냈다. 매혹된다는 말은 이런 기분을 뜻하는 것이구나. 무용수의 너무나 안정적이고 기품 있는 움직임은 무서울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 순간에 취해 있는 나를 향해, 어느새 앞 수업을 끝낸 선생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무 멋있죠? 율리아나 로파트키나가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였던 때의 공연이에요."


어쩜 무용수 이름까지도 완벽하구나. 율리아나 로파트키나, 흑조 오딜, 아름다운 악(惡), 그리고 그날 화병에 꽂혀있던 안시리움 한 송이, 그 새빨간 치맛자락. 그 모든 것을 관통하여 흐르던 순간의 매혹.


백설공주의 드레스가 아니라, 백설공주의 독사과 같은데?


이 화려한 열대 꽃은 선명한 색감과 반짝이는 광택감을 가지고 있다. 독특한 꽃 모양이 매력적이기도 하고, 공기정화 능력도 뛰어나서 집이나 사무실에서 흔하게 키우는 아이다. 특이한 모양 때문에 별명도 많은데, 홍학을 닮았다고 플라밍고 릴리라고 불리기도 하고, 꽃의 생김이 심장에 꽂힌 화살 같다고 하여 큐피드의 화살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특히 붉은 안시리움은 우아한 자태 때문에 백설공주의 드레스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안시리움의 학명 Anthurium은 그리스어의 anthos(꽃)과 oura(꼬리)가 합쳐진 말로, 꼬리 모양으로 생긴 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백설공주의 드레스라고 불리는 빨간 꽃잎은 사실 꽃잎이 아니다. 우리가 꽃처럼 인식하는 붉은 하트 모양 잎은 불염포라는 큰꽃떡잎에 해당하고, 진짜 꽃은 불염포 한가운데 길게 솟아있는 노랗고 길쭉한 꼬리 모양이다. 그래서 이름이 안시리움인 게지.


꽃으로 오해받을 만큼 화려한 불염포 덕택에, 절화로도 그 자태가 매우 독보적이다. 화병에 안시리움 한 송이만 툭 꽂아놓아도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안시리움 절화는 수명도 아주 길다. 장미나 튤립, 거베라 등 다른 꽃들은 아무리 열심히 관리를 해도 평균적으로 일주일 내외면 시들어버리지만, 안시리움은 절화로도 보통 20일에서 길게는 40일까지도 싱싱함을 유지할 수 있다. 두껍고 단단한 불염포가 수분 손실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안시리움은 천남성과에 속해, 옥살산칼슘이라는 독성을 지니고 있다. 옥살산칼슘은 아주 미세하고 날카로운 바늘 모양의 결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섭취될 때 구강과 점막 조직을 물리적으로 찌르면서 손상을 입히게 된다. 그래서 안시리움을 먹으면 타는 듯한 작열감과 아린 맛을 느낄 수 있고, 심한 자극으로 인해 구강이 부어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어린 아이나 반려동물이 있는 집에서는 안시리움을 포함하여 몬스테라, 디펜바키아 같은 천남성과 식물을 키울 때엔 주의가 필요하다.


그 정도라면, 사실 백설공주의 드레스가 아니라 백설공주의 독사과가 더 어울리지 않나? 겉으로는 아름답고 먹음직스럽지만, 치명적인 독을 숨기고 있는 그 사과. 율리아나 로파트키나의 오딜처럼. 아름다움의 정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 속은 파멸을 향한 악마의 손길이 깃들어 있으니.


적어도 나에게는, 그날 이후 안시리움은 매혹적인 악마의 속삭임이다. 처음 만난 오딜의 아찔한 유혹 말이다. 안시리움을 바라볼 때면 숨을 깊이 들이쉬길 권한다. 화려한 미(美)에 취해, 모든 것을 망치는 줄도 모르고 속절없이 빠져들지 않도록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야 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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