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과 밖, 진짜 나는 누구일까.(1)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첫 학부모 상담의 당혹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던 포근한 공기의 촉감과 선생님께서 건네신 찻잔의 온기도 생생하지만, 모든 것이 보드라왔던 그 공간을 뚫고 나온 나의 삐걱거림과 당혹스러움이 가장 선득하게 기억난다. 그때 나는 선생님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 딸은 필시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가 틀림없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집순이, 게으름뱅이, 느림보... 우리 부부는 태생적으로 느긋하고 내향적인 아이를 두고 종종 저렇게 놀리곤 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한 번 집에 들어오면 설령 놀이터에 살아있는 기린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집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을 순도 높은 집순이다. 지금이야 대화라도 잘 되니 망정이지, 유아기에는 주말에 외출이라도 한 번 하려면 나가기 싫다고 고집부리는 아이와 한두 시간 씨름을 벌이고서야 겨우 입이 댓 발 나온 아이를 데리고 현관문을 나설 수 있었다.
집 안에서의 주된 서식지는 한결같이 소파였다. 손목 발목까지 통통한, 두 돌 갓 넘은 아이가 소파 위에 낑낑 기어올라가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에 착 걸친 채 발라당 드러누워 “하아" 감탄사를 내뱉으며 노곤노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는 모습은 엄마가 봐도 기가 막혔다.
아이에게 처음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물었을 때의 대답은 이랬다.
"귀찮은데… 나는 그냥 누워서 TV나 보고 그림이나 그리고 살고 싶어."
(뉘앙스와 맥락상, ‘화가’ 등 특정 직업을 의미한 답변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다 귀찮아,가 입에 붙은 애다. 밥 한 끼 먹으려면 한 시간은 기본이고, 씻으라고 하면 한 세월을 보내야 화장실로 향하고, 화장실에 들어선 이후에도 칫솔에 치약 묻히는 데까지 또 다른 한 세월을 보내야 한다. 뭐든 재촉이라도 하면 굳이 서둘러야 하냐고 대답마저 느릿하게 반문하는 그런 아이다.
그런 우리 아이를 두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교 한 번 다녀보고 재입학한 것처럼 잘 지내요. 아침활동도 제일 먼저 내는 편이고, 줄 서기나 교실 이동도 빠릿빠릿 움직이며 다른 친구들을 잘 도와줘요. 성취욕구도 상당히 있는 거 어머니도 아시죠?"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난해한 표정으로 여쭤봤다.
"제가 별이 엄마인 건 아시죠?"
눈을 크게 뜨며 당연하죠,라고 답하시는 선생님께 나는 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만 6년간 쌓인 수없이 많은 사례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선생님은 어머 어머,를 연신 외치다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다.
"학교에서 온 에너지를 쏟으며 본인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지내고, 집에 가서는 방전되는 어린이들도 있어요. 별이가 그런 아이인가 보네요. 어머니께서도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모습이 있지 않으세요? 그런 것이라 생각하시면 되죠."
아직 아기인 줄만 알았던 내 아이에게 내가 모르는 자아가 있다니, 꽤나 짜릿한 통찰의 경험이었다.
하긴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남들 모르는 하이드 씨 하나씩은 품고 사는 것 아니겠나. 나 또한 가족이나 친구들과 있을 때의 '나'와 직장에서의 '나'는 전혀 별개의 인격처럼 다른 모습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