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는데요.
내가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어이가 없다는 실소가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사십 평생 개를 무서워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귀납적으로 완성된 '견주'들에 대한 나의 평가는 대개가 배려심 없고 무례한 사람들이라며 편향적으로 고착화되어 있었다. 강아지를 키운다면 덮어놓고 박절한 평가를 내리던 내가 스스로 강아지를 키우겠다니, 황당해하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
한평생 가져온 나의 편견에 대해 변명을 좀 해보려 한다. 산책길 저 편에서 강아지가 보이면 나는 일찍부터 멀찍이 멀어지려 노력한다. 그런데 가끔 개들 중에 기민한 녀석들은 내가 저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귀신 같이 알아챈다. 도대체 내 두려움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 개들은 냄새를 잘 맡는다는데 혹시 감정에도 냄새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 두려움을 알아챈 녀석들 중 일부는 멀어지려는 나를 향해 오히려 신이 나서 짖으며 더욱 다가와 장난을 친다. 그런 상황에 이르면 나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피하는데, 물론 즉시 강아지를 제어해 주는 견주도 있지만 그 상황을 오히려 재미있어하며 우리 애가 놀고 싶어서 그래요, 하고 저희 개를 내버려 두는 경우도 정말 많았다.
본인들이야 마냥 귀여운 강아지이고 그저 재미있는 상황이겠지만, 당하는 나에게는 꽤나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한 번은 자그마한 말티즈가 어찌나 사납게 짖으며 나를 계속 쫒는지, 혼비백산하여 강아지를 치워달라며 소리를 꽥 지른 적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견주 아주머니는 오히려 나를 나무라며 말했다.
"어머,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쪼그만 게 뭐가 무섭다고. 우리 애가 더 놀랐겠다!"
아,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어쨌든, 그런 내가 강아지를 키우게 된 이유는 100% 딸아이 때문이다.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아이는 네 발 달린 동물이라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니, 발이 없는 것부터 여덟 개 달린 것까지 동물계에 속한 생물이라면 마냥 사족을 못쓴다. 그나마 다리가 아홉 개 이상인 것들에 대해서는 아이도 징그럽다고 평가해 주는 것이 다행인 지경이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우리 아이의 소원은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었다. 번번이 안 된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독립하여 혼자 살거든 키워라, 단호히 반대해 왔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이 딱 맞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래 살던 동네에서 멀리 이사를 오게 되었고, 아이는 학교 갔다 돌아오면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올 때까지 매일 몇 시간씩 혼자 집을 지키게 되었다. 집에서 혼자 외롭다며, 제발 반려동물을 키우게 해 달라는 아이의 간청에 나는 굴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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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겨울 어느 화요일 밤 열 시 반, 평소라면 절대 바깥에 나와있지 않을 그 시간에 우리 가족은 조그마한 새끼 강아지와 강아지 용품 한 아름을 품에 안은 채 길바닥에 서 있었다. 강아지를 키우기로 결심하고 시장 조사차(?) 가벼운 마음으로 첫 상담을 갔던 가게에서 아이는 말티푸 호두와 한눈에 뿅 사랑에 빠져버렸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챈 사장님이 한 시간 넘게 쏟아낸 달변에 홀라당 넘어가, 우리는 호두와 강아지 용품 한 보따리를 안고 나서게 된 것이다.
가게를 나오자 아직 제법 매서운 겨울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렸다.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귀신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그래봤자 소용없었다. 딸아이는 강아지가 추울까 제 점퍼 안에 넣어 꼭 끌어안은 채 마음껏 사랑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이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 나는 온 세상을 잃은 것 같았다. 이제 저 강아지는 꼼짝없이 우리 집 강아지가 되었다.
아... 멍멍아, 우리 친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