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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와 맞짱 뜨기 위한 나만의 갑옷

실내용 슬리퍼와 긴팔 파자마

by 정벼리

호두를 거실에 내놓기로 결정하였을 무렵 호두는 700g 정도에 불과한 아주 작은 강아지였고, 애교를 부리는 것 외에는 한 번도 성깔머리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주 착한 강아지였다. 그래서 갑자기 나를 물거나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이성적 확신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은 이성을 지배할 수 있어도,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지는 못하는 법. 호두와 함께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강아지에게 맨살이 닿을 때 나도 모르게 온몸의 털이 쭈삣 서며 발 끝부터 소름이 좌악 돋는다는 것이다.


호두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제 아무리 재미있게 놀거나 맛있게 밥을 먹다가도 거실로 가족이 나오면 부리나케 꼬리를 흔들며 뛰어와 앞발과 코를 부비고 날름날름 핥았다. 당연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외출 후 현관에 들어서거나 방에서 나오면 나에게도 호두가 파닥파닥 달려왔다. 가끔은 어찌나 빠른지, 이 멍멍이가 사실은 뛰는 게 아니라 낮게 날아오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특히 아침마다 호두는 이산가족을 상봉한 듯 감격에 젖어 내 발치에 매달려왔지만, 나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호두가 고개를 홱 돌리고 반짝이는 까만 눈을 부딪혀오는 순간 근육이 굳었고, 파다다다 달려와 부드러운 털을 발목에 부비면 전신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목덜미까지 쭈삣한 그 느낌을 몇 번 겪고 나자, 이건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유난히 아침잠을 떨쳐내기 힘들어하는데, 매일 아침을 말 그대로 소름 돋는 기분으로 시작하다니. 이건 좀 괴롭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현대인이 마주하는 사소한 문제의 상당수는 소비로 해결되곤 한다. (건강한 방법이 아닐 때가 많다는 함정이 숨어있긴 하지만.) 나의 상쾌한 아침을 담보하고, 과외로 저녁에도 소름 돋지 않는 편안한 삶을 위하여 적극적인 소비에 나섰다. 호두가 닿을 때 소름이 돋으니, 맨살에 안 닿게 하기 위해 몸을 가릴 것을 찾았다. 바로 실내용 슬리퍼와 긴팔 파자마 세트이다.


지갑이 가벼워질수록 마음도 가벼워진다고 했나. 일종의 보상소비로 인한 도파민 분출상태에 빠져들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터넷 쇼핑몰을 탐닉했다. 남편이 물었다.


"또 뭘 사려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실내 슬리퍼를 신고 긴팔 긴바지로 실내복을 바꾸면 호두가 달려들어도 소름이 돋지 않을 것 같아."
"실내 슬리퍼는 결혼하고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불편해서 포기했었잖아. 굳이 또 슬리퍼를 사게?"


나는 눈을 세모지게 만들며 반박했다.


"불펴언? 불편?!? 지금 슬리퍼 신는 게 불편하니 마니를 따지는 거야? 호두 털이 닿을 때마다 소름 돋는 기분이 삶의 질을 얼마나 저하시키고 있는데! 안 겪어본 사람이 뭘 안다고 그래? 그리고 누가 당신한테 신으래? 내가 신을 거라고, 내가!"


남편은 곧바로 항복을 외치며, 당신 마음에 드는 걸로, 아주 좋은 걸로, 기왕 사는 거 취향에 딱 맞는 걸로 사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래, 그러지 뭐! 다양한 디자인과 소재, 구매후기를 요모조모 살펴 층간소음도 줄여준다는, 밑창이 도톰한 실내 슬리퍼를 골랐다. 내 맘에 쏙 드는 진한 노란색 옵션을 택해 구매버튼을 눌렀다.


이제 긴팔 파자마를 고를 차례였다. 추위보다는 더위를 타는 편이라 겨울에도 반팔, 반바지를 즐겨 입어서 긴팔 실내복은 그동안 거의 입어본 적이 없었다. 호두의 털 접촉 방지를 위해 긴팔, 긴바지를 사는 것이지만 소재가 너무 도톰하면 땀이 나서 또 다른 의미로 힘들 것 같았다. 얇은 면 소재의 파란 파자마로 주문했다.


호두에 맞서기 위한 나만의 전신 갑옷


배송을 받고 보니 파자마와 슬리퍼가 제법 어울렸다. 슬리퍼는 병아리색과 겨자색 사이 어딘가에 해당하는 딱 좋은 채도와 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파자마는 따뜻한 여름 바다색인데, 조금 더 연했으면 촌스러웠을 것이고, 더 진했으면 죄수복 느낌이 났을 것 같아 그 또한 딱 좋았다. 이것도 새 옷, 새 신발이라고 마음을 아주 들뜨게 했다.


깨끗이 세탁 후 나만의 전신 갑옷을 갖춰 입었다. 거실로 한 발짝 성큼 내디뎠다. 문 열리는 소리에 호두가 이미 도도도도 달려오고 있었다. 내 발목에 제 온몸을 부벼왔다. 닭살이 돋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슬쩍 호두 목덜미도 살살 쓸어보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명랑한 목소리로 호두에게 말했다.


"에헤이! 호두 이 녀석, 슬리퍼를 핥으면 안 되지!"


아, 성공이다. 이제 거실에서 1:1로 호두랑 맞짱을 떠도 나는 거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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