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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두입니다.

털뭉치가 우리 집 호두가 되기까지

by 정벼리

우리 가족이 늦겨울 찬바람에 덜렁 서있게 된 때에서 두어 시간 전으로 돌아가보면, 이런 풍경이었다. 조명이 환한 펫숍 한가운데 의자에 앉은 우리 아이는 베이지색 털뭉치를 꼬옥 안아 들고 연신 쓰다듬으며, 품에 안은 털뭉치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가게 사장님은 우리 부부를 향해 말티푸가 얼마나 귀엽고, 애교가 많고, 똑똑한 데다, 털도 빠지지 않아 집에서 키우기 좋은 강아지인지 쉴 새 없이 일장연설을 쏟아냈다. 하지만 한 번도 강아지를 키워본 적 없는 우리로서는 처음 방문한 가게에서 덜컥 강아지를 입양하기엔 고민의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사장님은 결정타를 날렸다.


"강아지는 물건이 아니에요. 생명이잖아요. 아이가 이미 저렇게 사랑에 빠졌는데, 다른 데서 다른 강아지를 안아본들 첫사랑을 잊을 수 있겠어요?"


뭐? 첫사랑? 내 딸의 첫사랑이 강아지라니!


그렇지만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아이는 사랑에 빠져버린 듯했다. 저 강아지를 내려두고 집에 돌아간다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닳아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남편과 나는 많은 속내를 담은 짧은 언어를 주고받으며 눈빛 교환을 반복한 끝에, 아이가 끌어안고 있는 털뭉치를 우리 집 강아지로 삼아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아이의 첫사랑(?), 호두


어차피 강아지를 들이기로 결심했으니,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컸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강아지의 존재를 기꺼이 원하는 것이 아닌지라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하지만 금방 집에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강아지 입양을 위해서는 각종 서류를 작성해야 하고, 그 과정에 길고 긴 설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강아지 분양 계약서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구매자의 이름, 주소, 연락처는 물론이고, 강아지의 견종과 생일, 접종 여부까지 꼼꼼히 기재된 서류에 서명을 해야 했다. 그런데 계약서 첫 줄부터 문제가 생겼다. 강아지의 보호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나와 남편은 자연스럽게 딸아이를 바라봤다.


"보호자는 저희 딸이에요. 저희 딸이 키우기로 한 강아지니까요."
"네, 맞아요. 제가 강아지 보호자예요."


아이도 활짝 웃으며 동의했지만, 사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법적으로 동물은 소유물이라, 미성년자가 계약을 할 수 없어요. 동물 등록을 할 때에도 관공서에서 미성년자를 소유자로 받아주지 않아요."


결국 구매자이자 소유자 란에는 내 이름이 들어갔다. 나는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아이를 향해 노파심에 속사포처럼 이야기했다.


"이건 명의신탁이야. 실제 강아지 보호자는 별이 너지만, 법적으로 미성년자가 계약당사자가 될 수 없으니 엄마 이름을 빌려서 계약을 한다는 거지. 그런 걸 명의신탁이라고 해. 계약은 엄마 이름으로 했지만, 사실 보호자는 너니까 별이 네가 강아지를 키우면서 맡기로 한 책임을 다 져야 하는 거야. 만약에 책임을 지지 못해서 발생하는 결과는 실제 보호자인 네가 져야 해."
"네. 알겠어요!"
"이 계약이 뭐라고?"
"명의신탁!"
"진짜 강아지 보호자는 누구라고?"
"저요!"


그 뒤로도 서류 작성은 물 흐르듯 이어지지 않았다. 당장 강아지 이름을 정하지 못해 한참을 주저했고, 결국 공란으로 둔 채 내일까지 이름을 정해 전화로 알려주기로 했다. 예방접종 내역, 강아지의 부모 건강 상태, 파양 시 주의사항을 듣고, 반려동물 인식표를 상시 부착하고 있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중간부터는 집중이 좀 흐트러졌지만, 강아지의 건강과 우리 가족의 권리의무를 위한 설명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에게 네가 보호자라고 일러두었지만 최소한의 책임감을 위한 조치였을 뿐, 중요한 내용은 결국 남편과 나의 몫이다. 등록 대행을 위한 양식도 작성해야 했고, 예방접종 증명서까지 건네받으며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서류 작업을 마쳐도 끝이 아니었다. 사장님은 처음 키우는 사람들이 필요한 준비물이 많다고 했다. 작고 부드러운 쿠션, 강아지가 원래 먹던 종류의 사료, 밥그릇과 물그릇, 배변 패드, 조립식 울타리, 샴푸, 빗, 탈취제, 이동장, 장난감까지. 가게를 나올 땐 망태 할아버지의 망태기처럼 커다란 자루가 남편의 두 손에 매달려 있었다. 애초에 단순한 결정 하나로 끝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게를 나설 땐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막상 강아지를 데리고 바깥세상으로 나오니 내가 꿈을 꾸었나, 이제 어쩌면 좋나 갑자기 조금 암담해졌다.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아이가 품 속에서 강아지를 꺼내며 아기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의 새 가족 호두입니다!"


남편과 나의 지친 얼굴에서 다시 웃음이 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강아지 이름을 호두로 정한 것이다. 이름을 짓고 나니 베이지색 털도, 때글때글한 머리통도 정말 딱 호두였다.


이제 정말, 함께 살아가는 일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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