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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엄마 (1)

by 지구인 Dec 23. 2024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시은의 모친은 딸의 눈에 마치 단아한 귀부인처럼 보였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고된 시집살이까지 겪으며 살아온 바람에 감춰져 있던 한여사의 인물이 모처럼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딸처럼 흰 편인 피부와 따로 시술을 하지 않아 눈가와 입가에 보이는 주름이 오히려 점잖은 느낌의 한복과 잘 어울렸다.


예식 당일 혼주 메이크업을 받고 나면 아마도 진원의 어머니보다 훨씬 얼굴이 환할 것이다, 시은은 생각했다.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은 사윗감을 얻은 기쁨이 더욱 그렇게 만들겠지. 시은은 자신의 결혼에 자신보다 더 기대하고 신나하는 모친을 새삼 인식했다.


엄마… 너무 잘 어울린다. 너무… 고와.


그래? 네가 보기에도 그러냐? 이 정도면 안사둔한테 안 꿀리겠지? 설마 그날도 주렁주렁 달고 나올라구.


시은모는 상견례 때 사부인이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하고 나왔던 모습을 떠올렸다. 평소 귀금속에 크게 욕심이 없던 그도 막상 상대의 목이며 손이며 팔목에 두른 반짝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자 딸이 백화점에서 사다준 진주브로치 외에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깔끔하고 단정한 데만 신경쓴 자신의 옷차림이 수수하다못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지도 않으시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조잡해 보이겠지. 엄마가 훨씬 더 우아해 보일 거야.


딸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는 것을 들뜬 한여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근데 정말 원단이며 좋긴 좋다~ 강남 유명한 집이라더니 때깔이 다르긴 하다. 역시 돈이 좋지! 재영이 때도 여기서 할까 봐.


신나서 수다를 떨었다.


경사를 앞두고 얼굴이 핀 것은 당사자인 시은이 아니라 그 어머니였다. 예비 신부는 기쁜 마음으로 들뜨는 대신 신랑감의 친구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앞두고 위태위태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경사 맞을 준비에만 여념 없는 신부 측 혼주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시은은 요한에게 메시지를 보내다 진원에게 온 전화에 제풀에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려 화면을 박살낸 순간, 진원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일종의 계시를 느꼈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용서를 빌고, 요한을 멀리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이 결혼은 망가져버리고 말 것이다… 시은은 그 생각에 사로잡힌 탓으로 부서진 휴대전화를 수리하지도 않은 채 평소 하던 대로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그러나 진원에게 진실로 속죄할 양이면 전화기부터 정상화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였을 것이다. 물론 시은은 진원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고 집에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번호 한 번 바꾸지 않고 계속 사용해 온, 02번으로 시작하는 일곱 자리의 개별번호에 연결된 유선전화기도 있었다. 그러니 진원에게 연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비록 휴대전화의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도, 각도를 잘 보고 화면을 터치하면 진원의 전화를 수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장 집전화로 실험해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장에서 입을 한복을 차려입고 너무도 좋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순간, 시은은 자신과 진원과의 결혼이 모친에게 갖는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그러한 까닭에 시은의 청사진은 백지화되어버렸다.


없는 집에 시집와서 성질 고약한 홀시어머니를 삼십 년 가까이 모셔야 했고, 성실한 축이지만 돈 버는 재주는 전혀 없는 남편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독한 약냄새를 참아가며 여인네들의 머리를 말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식당에 나가 김밥을 말거나 설거지를 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토록 그악스럽게 버틴 끝에 마침내 서울 변두리에 국민주택 아파트를 마련하고 딸 앞으로는 혼수비용을, 아들 앞으로는 주택청약을 부어온 모친의 악착스러운 삶을 시은은 모르지 않았다.


돈을 모을 줄만 알지 쓸 줄은 모른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딸의 결혼에는 신이 나서 은행에 묻어두기만 했을 돈을 거리낌없이 내놓으며 기죽어서는 안 된다고 할 때, 그러면서 자신이 모아놓은 돈에는 손도 대지 못하게 했을 때, 시은은 자신의 결혼이 이른바 ‘상승혼’인 까닭에 어머니의 마음에 더욱 흡족한 혼사임을 알았다.


그저 돈을 벌어 부모님께, 정확히는 그들이 딸 넷을 내리 낳은 후에야 얻은 외아들에게 가져다주느라 연애나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가 늦은 결혼을 한 시은모는 서민가정의 주부들이 그러하듯 날이 갈수록 억척스러워졌다. 그가 그렇게 버텨온 것은 자식들, 특히 딸자식이 자신과 달리 풍족한 결혼생활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술과 도박, 계집질만 하지 않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의 경제력이었다. 살을 맞부대며 자식을 낳고 살다보면 정이야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딸내미를 중매시장에 내놓으려던 참에 진원과의 연애를 알게 되고, 더구나 그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한여사는 무척 기뻤다. 첫딸을 낳고 울었던 것은 자신도 친정어머니처럼 혹시 딸만 내리 낳게 될까 걱정되고 시어머니의 구박이 무서워서이긴 했으나, 무엇보다 딸이 자신처럼 살게 될까 벌써부터 걱정되어서였다. 그는 그런 마음을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바로 위의 두 살 터울 나는 언니에게만 고백했었다.


아무리 맞벌이를 하고, 아니 해야만 하는 시대라고 해도 가족의 생계는 결국 남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신념의 한여사로서는 의사 아들에 본인도 대형로펌의 변호사로 입사한 사윗감이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금상첨화로 딸의 시가는 지방에 떨어져 있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진원은 학벌과 직업은 물론이고 외모부터 됨됨이까지 모두 훌륭했다.


그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조건인 자신의 딸에게 시종일관 지극정성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둘 사이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무뚝뚝함을 딸이 그대로 닮은 것 같아 예비 사위에게 민망했다. 내가 이날을 보려고 그렇게 고생했나 보다. 진원이 처음으로 인사를 왔을 때 모친이 부엌에서 과일을 깎다 말고 중얼거리는 것을 시은도 들었었다.


그날밤 한여사는 하느님께, 부처님께, 신령님께 감사를 드렸다. 특히 진원을 제외한 그의 가족들이 열심히 다닌다는 교회의 ‘하나님’께는 서툴게나마 ‘아멘’까지 붙여가며 진심을 다해 감사기도를 올렸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신이 아등바등 살아야 했던 것은 팔자소관이라고 여기던 그이로서는 너무도 가슴 벅찬 일이었기에 그날밤에는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잠귀가 어두운 편인 시은은 한밤중에 어머니가 여러 번 안방을 들락날락하는 것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엄마.


시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고 흰자위에는 실핏줄이 섰다.


아 왜에~


한여사는 얼른 한복을 벗어두고 딸의 밥상을 차려줄 요량으로 방문을 나서다 돌아섰다.


엄마. 엄마…


시은은 울면서 모친을 껴안았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시은이 기억할 수 있는 나이 이후로는 딸의 어깨 한 번 두드린 적 없는 한여사로서는 자신만큼이나 애정을 표현하지 않아 온 딸의 품이 영 어색했다. 둘째를 낳자마자 산후조리를 핑계삼아 시어머니에게 뺏기다시피한 딸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래도 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자신의 부모가 그랬듯 한여사도 자식들에게 따뜻하지 못했다. 칭찬보다는 비난을 앞세웠고 안아주는 대신 매를 들었다. 소심한 편에 속하는 남편과 아들, 그들보다는 오히려 강단이 있지만 자신의 기준에 흡족하지는 않는 딸에게 그이는 일종의 독재자였다. 다만 한결같이 정성 가득한 상차림과 깨끗한 빨래와 먼지 한 톨 없는 청결함을, 부업으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제공해 온.


한여사는 어정쩡한 자세로 딸에게 안긴 채,


왜 그래. 혹시 시어머니 자리가 뭐라 하대?


몇 번밖에 보지 못한 사부인의, 꽤나 우아한 언행과는 달리 표독스러움이 감춰지지 않는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니야…


시은은 모친을 안았던 팔을 풀고 눈가를 훔치며 대답했다.


엄마 걱정 안 해도 돼. 진원 씨가 워낙 잘 알아서 하고 어머님도 괜찮으셔.


시은은 웃어 보였다.


근데 왜 그래? 아님 직장에서 무슨 일 있어?


시은은 천천히 도리질을 했다.


아무 문제 없어.


그렇게 말하며 시은은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했다.


그냥 엄마가 너무 보기 좋아서. 내가 그래도 한 가지는 효도하는구나 싶어서.


얘는…


한여사는 낯까지 붉히며 열없게 웃었다.


자신의 그 수줍은 웃음이 딸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는 것을 한여사는 알지 못했다.


시은은 밥을 먹이려는 모친의 뜻을 걱정을 끼치지 않으면서 거절하기 위해, 모처럼 진원이 일찍 퇴근해서 만나기로 했다고 둘러대고 다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서며 시은은 당장이라도 진원에게 고백하려고 했던 결심이 무너져버린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부서진 전화기는 수리하면 된다. 혹시 비용이 너무 크면 전화기 자체를 구매하면 된다. 어차피 그동안 진원이 바꿔주겠다고 하는 것을 여러 번 거절하며 사용해온 오래된 기기였다. 아예 이 참에 기기를 새로 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망가지면 고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혼자인 진원을 바꿀 수도 없다. 대체 누구로 바꾼단 말인가.


진원 같은 남자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도 더 있을 거라고 낙관하기에는 시은은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설령 진원만큼 훤칠하고 능력 있고 집안까지 좋은 남자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진원만큼 다정하고 좋은 사람일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더구나 이미 그와 3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마당이었다. 시은은 진원을 만나고부터, 정확히는 그가 결혼을 말하면서부터,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 알아가고 친밀해져야 할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어질 미래가 반가웠다.


지루한 일상에서 연애란 달콤한 자극이지만 동시에 녹록지 않은 감정노동이기도 했다. 진원이 워낙 적극적으로 나온 덕분에 골치아픈 ‘밀당’이 거의 없이 시작해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순탄하게 결혼을 향해 온 그와의 연애과정이 엄청난 행운이었음을 시은은 뒤늦게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고 있었다.


시은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정문을 벗어나 인도로 들어섰다. 그녀의 걸음이 더 빨라지더니 뜀박질에 가까워졌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뛰기 시작했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내처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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