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프다는데 어떡하겠어요. 진원 씨도 제게 사정을 설명하고, 또 그 사람 초췌한 모습을 직접 보니 저도 더는 뭐라 못하겠더라고요.
시은은 사실 그대로 설명했다. 그러나 정여사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그럼 입원을 시키면 될 거! …아니 죽을병 아니면 갈 애가 아니지.
네, 병원 가길 너무 싫어한다고…
…제 아부지 생각나서 그렇겠지.
요한에 대한 정보를 제풀에 야금야금 내놓는 정여사의 반응에 시은은 자신감을 얻었다. 신혼집이 될 곳에 아픈 요한을 머물게 했다고 이토록 흥분하며 불쾌해하는 시어머니와 조금만 더 얘기를 하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머님. 제가 생각한 것보다 그 사람, 요한 씨가 진원 씨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서요. 피만 안 섞였지 정말 형제같이 생각하는 거 같아서.
…안다. 그래서 내가 속이 터지지.
그런데 어머님은, 그 사람을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 틀렸을까요?
시은은 정여사를 은근슬쩍 떠보는 여유까지 부렸다. 종이에는 그런 말까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얘, 나만 불편해하는 거 아니다. 네 아부지도 마냥 불쌍히 여기는 것만도 아니야. 그리고 그애도, 그애부터도 날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피한다고!
네… 그래서요, 어머님.
시은은 다시 한 번 침을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더 이상 종이는 필요 없었다. 많이 생각하고 연습한 말들이라 이젠 술술 나왔다.
제가 결혼하기 전에, 그 사람, 요한 씨에 대해서 알아야겠어요. 왜 진원 씨는 그 사람을 그렇게 돌봐주지 않아서 안달인 건지, 반면 어머님은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셔서 그러시는 건지… 진원 씨는 말을 안 해줘요. 앞으로 차차 친해지면서 알아가라고 하는데, 어머님이 그렇게 불편해하시는 사람을 제가 마냥 맘 편히 친하게 대하기는 마음에 걸려서요.
시은의 말에 정여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쳤다.
얘, 그앤 엄연히 너한텐 외간남자야! 무슨 친하고 맘 편히 지내고가 말이 되니? 세상에, 내가 확실히 말해두는데, 너 행여나 진원이 말대로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결혼식 같은, 그런 큰일, 거기서 그애 만날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뭐 맘 편히? 친하게? 얘가 무슨 소름끼치는 소릴 하고 있어.
제가 아니라 어머님 아들이 그러고 싶어한다고요, 라고 말대답하고 싶은 것을 시은은 꾹 눌러 참았다.
당신의 아들의 실수나 잘못조차도 며느리 탓을 하는 건 나이대는 상관없나 보구나. 그저 성격이고 인격인가 보구나. 시은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악다구니를 퍼붓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에게는 소중한 피붙이였으나 어머니에게는 독한 시어머니였을 뿐인 할머니는 며느리가 참다못해 말대꾸를 하면 말대답을 한다고 더욱 역정을 내곤 했다.
네에, 그래서요… 결혼하면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진원 씨잖아요, 어머님.
당연하지.
그래서 웬만하면 진원 씨가 바라는 대로 요한 씨하고도 잘 지내보고 싶거든요.
얘얘얘! 뭘 잘 지내냐니까! 그냥,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나 안면이나 트고 지내면 그만이라니까 뭘 또 잘 지내고 어쩌고 해?!
네에,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진원 씨 고집 어머님도 아시잖아요. 하랑, 아가씨하고는 영 다르잖아요?
어후, 그래서 내가 속터져 죽잖니. 의대도 가기 싫다, 기어코 동반입대하겠다, 선도 보기 싫다, 그애 연 끊는 것도 못한다, 너랑도 죽어도 못 헤어진다… 내가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는지 말도 못해! 너도 속 좀 끓일 거다.
시은은 아들을 탓하다가도 결국엔 며느리에 대한 공격으로 귀결되는 정여사의 현란한 말발에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그녀가 요한과의 일과 그에 대한 자신의 현재상태를 알게 된다면 자신은 그녀의 증오와 저주로 그야말로 갈가리 찢겨나가고도 남을 것임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시은은 두려움으로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렵게 용기낸 전화였다. 힘들어도 이어가야 했다.
어머님, 그래서요… 요한 씨에 대해, 그 사람이 진원 씨에게 왜 그렇게 소중한지, 그런데 어머님께서는 왜 그렇지 않으신지 어머님께 직접,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알아야,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제가 너무 불안해서요.
불안하다니… 무슨 일이 있었니?
시은의 말에 정여사에게도 기분 나쁜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시 화장대 자리에 앉으며 그이가 물었다.
아니면 너도 그애한테서 느꼈니?
네?
그 왜 쎄하고 불길한 기운 말이다. 지 엄마랑 똑같아서…
아아. 시은은 요한의 친모가 요한을 둘러싼 이들과 그들의 사연의 열쇠라는 자신의 직감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왠지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 사람 어머니한테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그래서 어머님이 싫어하시는 거예요?
자세한 얘긴 만나서 하자. 전화로 할 만한 얘기가 아냐. 내가 서울 갈 일은 다다음주에나… 목요일이든가 금요일이든가 있는데, 그때 볼 테니?
이젠 정여사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시은은 얼떨떨하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봬야죠. 하루빨리 듣고 싶기도 하구요.
우리 아들 요새 일이 많다던데, 시간이 된다니? 주말에는 좀 쉬어야지.
어머님과 단 둘이 뵙고 싶습니다.
시은이 또박또박 말했다. 정여사는 잠시 숨을 죽였다.
…그래, 그게 맞겠다.
진원 씨한테는, 요한 씨 일로 어머님 만나뵙는 거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결혼 전에 고부간에 따로 할 말이 있다고만 말하려고요.
알았다. 괜히 바쁜 애 신경쓰게 하지 말자. 여자끼리 할 말이라고 하면 더 알려 하지도 않을 거다.
아무리 살뜰하게 챙기는 타입이 아니더라도 어미는 어미였다. 아들의 성향만큼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정여사였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나도 마음에 걸리던 참이야. 괜히 긁어부스럼 만들까 싶어서 가만히 있었지. 어머 얘, 나 늦었다. 다시 연락하자.
통화연결이 끊어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긴장이 풀린 시은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시은은 점심도 거르고 들른 직장 근처 카페에서 일생일대의 통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집에서는 행여 어머니가 들을까 봐 전화할 수 없었고 전에 요한을 데려갔던, 그녀가 좋아하는 새로 생긴 카페는 사람이 너무 없어 직원에게라도 들릴까 봐 가지 않았다. 시은이 선택한 카페는 케이크를 비롯한 디저트가 맛있어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시간대를 크게 타지 않고 늘 어느 정도의 소란이 유지되는 카페였다.
시은은 시어머니와의 은밀한 통화를 위하여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내재되어 있는 값비싼 전화기를 덜컥 구매했다. 시은이 원한 기능보다는 기기 자체의 디자인과 인물이 잘 나오는 카메라로 유명한 제품이었다. 유행보다는 가성비를 따지는 그녀로서는 전에 없던 일이었다.
부서진 전화기 액정은 비공인 수리점을 이용한다면 저렴하게 금방 고칠 수 있었고 원래의 시은이라면 그 편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정의 증거물인 그 기기를 다시 보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시은은 요한과의 메시지가 초기화되는 것이 훨씬 낫다며 애써 변명거리로 삼았다.
요한과의 연락처는 여전히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에게 연락이 온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시은은 생각했다. 어느새 그의 전화번호가 완벽히는 아니지만 머릿속에 자리잡았다는 것을 그는 부정하고 싶었다.
한편 체온이 안정되어 고집대로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 데 성공한 요한은 이틀을 더 진원의 새집에서 요양한 뒤 마침내 돌아갈 수 있었다.
친구와 사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또다시 고집을 세워 돌아간 당일부터 바에 나갔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지겹고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냥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만 해도 과장 좀 보태서 매출에 동그라미 하나는 더 붙지 않겠어요? 요한의 당돌한 말에는 사장도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났다. 진원은 피식 웃으며 괜찮아요, 저 자식 다 나았네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깍듯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요한이 굳이 앞치마를 두른 이유는 누워 있는 것이 지겹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다 보면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그것들을 떨치기 위해서였다. 체온이 안정화되고 소화기능도 전처럼 돌아오면서 요한의 젊은 육신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잠이 적은 편인 그는 졸음을 유발하는 감기약까지 끊고 나자 누워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열이 떨어지고 두통도 사라진 요한의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는 것은 시은이었다.
그에게도 시은에게처럼 자신이 열에 들떠 저지른 일은 그의 육신에 생생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감각은 겨우 눌러놓았던 그녀와의 입맞춤에 대한 혼돈스러운 감정을 되살아나게 했다.
시은이 그저 접촉사고처럼 여기는 데에 반해 요한은 그 길지 않은 입맞춤에 완전히 현혹되었다. 술에 취한 탓으로 그가 느낀 시간은 실제보다도 더 짧은 단 몇 초에 불과하였으나 그 느낌은 강렬했다. 그의 혀가 시은의 입천장에 닿았을 때의 자극은 그야말로 전기가 오르듯 짜릿하게 느껴졌다. 요한 역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그 자극은 마치 눈부신 태양을 맨눈으로 보고 난 직후처럼 그의 시신경을 헤집는 듯했다. 몹쓸 약의 힘을 빌리면 그럴까. 요한은 그래서 사람들이 중독이 되고 폐인이 되나 싶었다.
운이 좋게도 그에게는 손만 뻗으면 여자들이 있었다. 그는 그 강렬했던 자극을 다시 얻고자 그녀들과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때의 느낌은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술을 마셔도 보았고 여자를 벽에 세워도 보았고 상대의 눈을 손으로 가려도 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때도, 그 어느 여자와도, 그때 시은과의 느낌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적잖이 실망한 요한은 한껏 달아오른 여자들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에게 올라탄 여자도 있었고 그의 뺨을 후려치는 여자도 있었으며 울며 뛰쳐나가는 여자도 있었다. 적극적이지도 다정하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는 했던 예전과 달라진 그의 행태에 여자 두엇은 불같이 화를 내며 주먹을 휘두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럼에도 끝내 그녀들 중 누구도 그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여자들이 가게로 쫓아온 것은 요한에 대한 소유욕보다도 그에게서 느낀 모욕감 때문이 컸다. 그를 따지러 온 한 여자가 그녀만큼이나 다혈질인 다른 여자와 마주치는 바람에 가게 안에서 크게 싸움이 난 것이었다.
요한은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때리면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았다. 덩치 크고 힘이 센 사장이 없었다면 요한은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을 선택하라거나 지난밤을 만회하라는 요구만큼은 칼같이 거절했다.
이젠 필요 없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