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의 호출로 달려온 진원의 아연실색한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요한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뭐라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는 사장과 진원이 하는 대로 인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떠밀려 탄 자동차 조수석에서 바라본 진원의 옆얼굴은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그러나 진원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운전에 방해가 될까 봐 친구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요한은 오랜 경험으로써 알았다. 그래서 그도 차 안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미안해, 잘못했어, 외에는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내려. 평소보다 다소 거친 운전을 마친 진원이 명령조로 말하자 요한은 순순히 따랐다.
어려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그런 식이었다. 형과 동생, 때로는 상사와 부하직원 같은. 이렇게 사고를 친 자신을 대할 때, 요한은 진원을 엄하면서도 든든한 아버지처럼 느낄 때마저 있었다. 실제로는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요한은 죄책감을 느꼈다. 차마 진원에게 말할 수 없는.
고개 숙인 요한을 뒤로 한 채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앞서간 진원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서 작은일을 보고 나오더니 멍하니 서 있는 요한에게 세탁해 놓은 자신의 트랙슈트와 시은이 사다놓은 새 칫솔을 던져주며 씻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불편한 손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요한에게 눈짓으로 주방으로 오게 한 뒤, 급히 지혈만 하기 위해 사장이 마구잡이로 감았던 피 묻은 타월을 풀고 그의 손에 소독제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미안… 닥쳐, 새꺄. 진원은 요한의 얼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의 말을 잘랐다. 요한의 상처 치료를 마친 그는 침실로 가 붙박이장에서 꺼낸 이불을 바닥에 던지듯 깔고 누워, 또다시 명령했다. 그러나 요한은 이번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왜, 침대가 아니라 불만이셔? 힘쓸 거도 아닌데 좀 딱딱하면 어때. 뭐, 하도 써대서 허리도 아프냐? 진원이 좀처럼 하지 않는 시비조로 말했다. 요한이 살고 있는 방은 좁아서 침대가 들어갈 자리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진원이 그렇게까지 말할 때는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왠지 웃음이 났다. 웃어? 진원의 얼굴이 험악해졌으나 요한은 소리까지 내서 웃기 시작했다.
진원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서 미칠 것 같은데 왜 눈물 대신 웃음이 나오는지 요한도 알 수 없었다. 진원은 너무 어이가 없어 화를 내지도 못했다. 잠시 후에 진원의 입에서마저 피실피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둘은 마주본 채 크게 웃었다.
너 이 자식… 이젠 좀 작작해라. 그러잖아도 시은이가 너 그러고 다니는 거 안 좋아해. 슬슬 정착하라니까 외려 이 사달을 내냐. 겨우 웃음을 멈춘 진원이 정색하며 말했다. 시은의 이름에 요한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지만 진원은 알아채지 못하고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여튼 그만 누워라. 자세한 얘긴 내일 하든지. 미안하지만 나야말로 요새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바닥에선 도저히 못 자겠다.
그가 설늙은이처럼 끙, 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섰다. 아이고… 씻어야지. 씻고 자야지. 우리 신부님이 싫어하셔요… 진원은 기도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가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며 알몸으로 나왔다.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주섬주섬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내 대충 꿰어 입고서는 에어컨을 켜더니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두피만큼은 바짝 말려줘야 한다는 약혼녀의 지시를 수행하기에 진원은 너무 피곤했다. 그는 사흘 연속의 야근 끝에 마침내 퇴근을 하려던 찰나에 요한네 사장의 전화를 받고 그대로 달려갔었다.
진원은 주중에 일에 치여 지내며 손꼽아 기다린 금요일밤의 퇴근길에 치킨을 한 통 사가지고 와서 모처럼만의 치맥을 즐기며 그동안 볼 시간이 없어 미루었던 프리미어리그의 축구경기를 보다 잠들 계획이었다. 이날을 위해 진원은 지난 이틀 동안에는 저녁은 샌드위치나 김밥따위로 때워가며 자정 가까이까지 일했다. 좋아하는 맥주도 이를 악물고 참았었다.
그러나 요한의 사고가 터지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쉬워할 틈도 없이 이미 입맛은 달아나버렸고 긴장이 풀리자 배고픔과 졸음이 동시에 몰려왔다. 진원은 비슷한 상황에서는 늘 그렇듯이 배고픔도 잊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평일에도 ‘저녁 있는 삶’을 누리는 신혼생활을 위해 그토록 분투하고 있었다.
요한은 전등도 끄지 않은 채 잠들어버린 진원을 그가 바닥에 깔아준 이불 위에 앉은 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진원의 이삿날 그가 가져다주어 거실 소파에서 덮고 잤던 이불을 이런 식으로 다시 덮게 될 줄은 몰랐다. 요한은 그날밤까지만 해도 실수이고 사고였던 일이 예상 외로 커져버린 상황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모든 것은 결코 그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무언가에 홀린 듯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저지른 것은 결국 요한 자신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괴로움에 무릎을 세워 모으고 그 위에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린 채 젖은 머리를 감싸안았다.
언제 요한이 진원이 잠든 침대에 엎드리게 되었는지는 요한 자신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도 습관처럼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진원에게 집밥을 가져다주러 온 시은이 그를 보고 놀라고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시은은 보통의 엄마가 아들들에게 하듯 밥상을 차려주었다. 만든 이의 정성과 차린 이의 걱정이 합쳐져 그가 먹어온 어느 음식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뱃속이 편했다. 이게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라는 거구나. 그때 요한은 시은을 가진 진원이 부러웠다.
집밥 덕분인지 진원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요한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뉘우쳤다. 진원 커플에 대한 결코 간단치 않은 감정의 실타래도 풀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퇴근하는 시은을 기다려 만났다. 시은이 의외로 순순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카페로 안내하고는 자신을 배려해 구석자리에 앉히고 음식을 주문하고 픽업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요한은 새삼 그녀가 단단해 보인다고 느꼈다. 그녀를 정식으로 처음 만난 날, 술 취한 진원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날 마침내 가까이에서 보게 된 시은의 일거수일투족을 요한은 집요하게 두 눈에 담으며 그녀가 진원을 사랑하지 않는, 적어도 진원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한참 덜 사랑하는 증거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요한은 시은이 진원이 지친 머리를 기댈 수 있는 여자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철없던 시절 꿈꾸어본 적도 있으나 머리가 굵어지며 포기한, 자신은 줄 수 없는 진정한 위안을 진원에게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다.
요한의 고해성사에 시은은 충격을 받은 것 같으면서도 침착히 대응했다. 자신을 비난하지도, 더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 같았다. 몸 걱정을 해주는 것이 그저 가엾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약혼자와 같았다.
그런 점이 진원을 매료시킨 것이라고 요한은 생각했다. 아마 첫눈에 반했다고는 해도 시은의 속이 단단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줄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진원은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었다.
그러고 돌아와 술병이 난 그는 이제는 자신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가 된 생모가 떠나는 꿈을 되풀이해 꾸었다.
꿈에서 어릴 때로 돌아간 요한은 울며 친모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과 닮았지만 좀 더 선이 곱고 처연한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사라져갔다. 그리고 호통치고 야단쳐서 무섭기만 한 아버지와, 그저 의붓자식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두렵게 하던 계모가 보였다.
요한은 추웠다. 오한을 느꼈다. 열에 들뜬 육체는 물론이고 혼란스러운 정신마저도. 꿈에서 그는 어린아이인 채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윽고 무서운 아버지와 계모는 사라지고 대신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어린 요한에게 흰 눈을 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조그맣고 여윈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물범벅인 어린 요한에게 역시 어린 진원이 실제로 그랬듯 손을 내밀어주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요한은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요한은 진원에게 안겼다. 어린 진원이 어린 요한을 꼭 안아주었다.
잠시 후 어린 진원이 현재의 모습으로, 곧이어 시은의 모습으로 변했다. 잠결이었으므로 요한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 순간 현실의 그는 시은의 움푹한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침대에 눕혔을 때 요한은 여자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으로 몸을 구부렸었다.
오랜만에 본 하랑은 전보다도 더 예뻐져 있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나이니까 당연했다. 그러나 요한의 신경은 온통 시은에게 쏠려 있었다. 이삿날의 일은 넘어갔지만 이번 일도 그래줄까. 아니 그보다도 요한은 여전히 시은을 안고 싶었다. 그녀 옆에 그녀보다 훨씬 어리고 훨씬 예쁘다고 할 수 있을 하랑이 있었고, 그가 그동안 안아왔던 많은 여자들이 있었지만, 그 순간 요한은 시은만을 안고 싶었다.
시은이 그랬던 것처럼 요한도 그녀에게 몇 번씩 연락하려다 가까스로 참아냈다.
뭐라 한단 말인가. 그녀의 목을 졸랐던 때처럼 미안했어요,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어요, 라고?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난 뒤처럼 또 직장 앞으로 찾아가야 할까? 그러나 이번엔 순순히 만나주지 않을 것만 같다. 오히려 더는 참지 못하고 진원에게 말해버릴지도 모른다. 이제는 진원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시은을 다시 보지 못할까 봐 그게 더 두려워졌다.
요한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더 이상 다른 여자들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들이 더 이상은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으리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며칠 후 퇴근하며 바에 들른 진원은 부쩍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괜히 찔려서 물어보니 그냥 일이 많아서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아 재차 물으니 시은이 좀 이상해졌다고 진원은 말했다. 결혼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다고. 전에 없이 넋이 나가 있고 짜증까지 늘었다고.
…그날이어서 그런 거 아냐? 요한이 짐짓 말했더니 그러면 미리 말하고 쉬는 타입이야. 그리고 짜증보다는 몸을 힘들어하는 타입이고. 더 말이 없어지지. 친절히 설명해주던 진원은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아무튼 그건 아닌 거 같아,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이것저것 신경쓸 게 많으니 그렇겠지, 사장이 끼어들었다. 그쵸? 진원은 사장의 말에 반색했다. 저야 그저 사진이나 찍고 식장에만 가면 되는데, 신부는 뭐 할 게 많은 거 같더라고요. 더구나 제가 바쁘다 보니 신혼여행도 시은이가 다 알아보고… 다른 뭐 필요한 것들도 그렇고. 아이고 시은 씨가 정신없겠네. 사장의 말에 결혼 후 대비해서 일부러 지금 일을 늘려서 하고 있는데 잘못한 건가 싶기도 하고… 진원은 한숨을 쉬며 고급 위스키가 든 술잔을 들이켰다. 그가 사장에게 선물로 들고 온 것이었다.
그때 진원에게 시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뻐하며 전화를 받으러 가게 밖으로 나갔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온 진원에게서 시은이 정여사를 만나러 D시에 넘어간다는 얘기를 들은 요한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시은이 자신의 사연을 알아내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