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진원이와 있는 게 화가 나. 질투가 나. 그런데 그게 너에 대한 건지 녀석에 대한 건지 헷갈려.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요한은 시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기대하지도 않았고, 시은이 마침내 자신의 번호를 차단했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했지만 보내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그는 한 팔을 눈가에 얹고 눈을 감았다.
바에서 있었던 난리통에 깨진 유리들에 찔리고 베었던 손의 상처는 다 아물었으나 그 흔적은 아직 남아 있었다. 요한은 문득 그 흔적에서의 통증을 강하게 느꼈다. 그의 무릎 위에는 시은이 떨어뜨리고 간 야구모자가 놓여 있었다.
이십대 때 실연하고 돌아와 종종 그러했듯이 침대에서 몸을 웅크린 채 숨죽여 울고 있던 시은은 요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의 연락처를 수신거부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젠 결론이 날 것이다. 마침내 요한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면, 그럼에도 그를 계속 참고 버텨내야 할지 아니면 아예 진원에게서조차 떨어뜨려 놓아야 할지를. 아니면… 시은은 차마 그 다음을 머릿속으로 이어갈 수 없었다. 그 차마 상상하기도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진원과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시은은 안간힘을 써 왔다.
그러나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요한이라는 존재의 예측불가능한 행태에 시은의 노력은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그녀를 마구잡이로 흔들어놓고 겨우 평정을 찾았다 싶으면 다시 들쑤셔놓는 그에게 시은은 너무도 무력했다. 지난날의 실연들은 평소 즐기는 많은 상상의 이야기들로써 어렵지 않게 잊어왔지만, 요한과의 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시은은 장담하지 못했다. 시은은 남자친구들과 헤어지고 돌아왔던 그 어떤 때보다도 많이 울었다.
요한이 시은으로부터 일터로 돌아갔을 때에는 예상 외로 연주가 와 있었다.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짧은 머리에 단정한 바지 정장을 입고 동그란 안경을 걸친 예의 ‘언니’와 함께였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으므로 가게에 손님은 많지 않았고 연주들은 바에서 사장과 이런저런 이야기 중이었던 것 같았다.
오빠. 연주가 요한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늦었다. 그만 가지 그래. 연주에게 반가움의 인사말 대신 귀찮다는 듯 작별을 말한 요한은 벽걸이에 걸린 앞치마를 손에 들고 가져온 모자를 그 자리에 조심스레 걸었다. 그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는 검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둘러맨 뒤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던 연주가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오빠, 나랑 얘기 좀 해요.
…너한테 꼭 말할 게 있다고 기다렸다. 잠깐 나갔다 와. 사장이 요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요한은 작게 한숨을 쉬었으나 이내 앞치마를 벗었다.
어디 갔다오는 거예요?
가게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요한을 뒤따라오던 연주가 따지듯 물었다.
무슨 상관이야.
요한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친구한테 간다고 했다던데, 그 결혼한다는 오빠는 아까 왔다갔다던데 친구 또 누구요? 오빠 그 오빠 말고 친구 없잖아.
…얘기할 게 그거면 관두자.
요한은 지금 시은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신경써지지가 않았다. 그동안 얌전히 굴던 연주가 또 왜 이렇게 앙칼지게 구는지 요한은 짜증이 나려 했다.
오빠 정신 좀 차려요. 언제까지 그렇게 몸 막 굴리고 다닐 거예요? 그 여자들 오빠 가만 안 둔다고 난리였다고. 고소한다는 여자도 있었어. 내가 다 막아준 건데.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그냥 두고보냐고!
요한은 골부리는 연주를 보기만 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가 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시은에게 엉뚱한 마음을 품어놓고 연주를 나무랄 수는 없다고 여겨져서였다.
…너 거짓말한 거야? 나 포기 안 한 거니?
요한이 담담히 물었다.
오빠야말로, 그 언닐 좋아하는 거야?
뭐?
여자들한테서 다 들었어. 여자들 눈 가리고 키스만 했다면서. 이게 아니야, 시은인 이렇지 않았어, 라고 했다면서.
연주는 날선 고양이처럼 대들었다.
…꺼져라.
요한은 담배를 문 채 짧게 내뱉고는 다 피운 담배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꽁초를 들어 감싼 후 휴대용 재떨이에 넣었다. 볼일이 끝난 그는 연주에게서 돌아서 가게 쪽으로 향했다.
내가 그 오빠한테 다 말해버릴 거야!
연주가 돌아서는 요한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요한이 우뚝 섰다. 조금 전 시은에게 자신이 협박하듯 말했던 것과 똑같지 않은가. 이어 시은에게 저지른 또 한 번의 추행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감정적으로 몹시 고조된 상태였으나 술에 취하지는 않은 탓에 입안의 감각만이 펄떡이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처럼 거셌던 지난 입맞춤과는 달리, 이번에는 시은의 얼굴을 감싸안았을 때의 말랑한 볼의 촉감과 순식간에 그의 후각을 점령한 보드라운 샴푸향까지도 또렷이 느껴졌던 것이 기억났다.
요한은 화가 났다. 그 느낌을 다시 가져보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그 분노가 연주에게로 옮겨졌다.
그래? 잘됐네. 말해. 어차피 나도 그래버릴까 고민중이거든.
요한이 연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무서울 것도 없다고. 저질러버려. 차라리 그게 낫겠다.
요한은 연주가 전처럼 자신을 마구 때리고 할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연주는 발꿈치를 들어올리더니 요한의 흰 셔츠를 두 손으로 잡아내리며 그에게 입술을 맞대어왔다.
다시금 자신이 시은에게 한 것과 똑같이 구는 연주의 행동에 요한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고장난 기계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로, 그는 연주의 서툰 입맞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진원의 이삿날밤 종로의 매운낙지집 앞에서 겪은 시은의 상황을 뒤늦게 체감하면서.
요한은 그러나 연주가 어설프게 혀를 내밀자 상대방에게서 빠져나왔다.
미안한데 아무 느낌 없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연주야!
연주가 요한의 상의를 놓으며 고개를 떨구었을 때 연주의 동행이 건물 입구에서 뛰어나왔다. 그녀가 불렀음에도 연주는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있었다. 연주와 달리 큰 키에 단단해 보이는 체격을 지닌 그녀는 연주의 어깨를 감싸며 괜찮아? 걱정스레 물었다.
연주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주의 동행은 그런 연주를 보다가 요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낮은 신발을 신었는데도 요한의 눈썹쯤에 머리가 솟은 그녀가 말했다.
이제 다 그만두고 제대로 된 연애 좀 해요. 결혼해버리면 더 좋고. 아니면 아예 머리를 깎든가!
그녀는 요한에게 쏘아붙이고 연주를 뒤쫓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경고 또는 충고는 요한의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요한은 지금의 자신과 달리 좀전의 시은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던 것에 다시 기쁨이 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시은이 내게… 그렇다면… 아니 그렇다면 진원은… 좋아할 일만은 아니구나. 요한은 생각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승부욕을 요한은 강하게 느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진원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로채고 싶다는. 요한은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진원을 형제처럼 연인처럼 사랑한 게 아니었어? 그저 그가 부럽고 그가 가진 것이 갖고 싶었을 뿐이었나? 사랑이라고 착각한 건가? 포장한 거였나? 요한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저 진원을 동경했고 녀석처럼 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안 되니 갖고 싶어한 것뿐이었는데. 사실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저 놈을 질투하고 있었나? 나를 경멸하는 여자의 아들에게 상처주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나?
그러나 요한은 여전히 진원이 너무 고맙고 너무 좋았다. 천진한 그의 미소를 요한은 사랑했다. 뜻을 세우면 좀처럼 꺾지 않는 그의 대나무 같은 기세를 사모했다. 끝끝내 자신을 놓지 않은 그의 끈질긴 동정심에 감복했다.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던 녀석은 그때 병까지 났었는데. 그런 녀석에게 내가 어떻게…
그때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한은 전화를 받으며 가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더는 폐 끼치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 그는 바의 출입문 앞에서 은근한 미소를 띤 영업용 표정을 장착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업무에 복귀했다.
연주가 뭐라디? 사장이 요한에게 다가와 소곤거렸으나 요한은 여전히 미소하며 별일 아니에요, 답하고는 계산하려는 손님 일행에게 감사합니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평소보다 톤을 높여 응대하며 공손히 카드를 받아들었다. 그 바람에 사장은 더는 캐묻지 못했다.
요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마감 작업을 했다. 자신의 존재따윈 잊은 듯 신들린 것처럼 마무리 청소를 하는 그를 보며, 사장은 요한에게 무언가 고민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너 어디 다녀온 거냐.
요한이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장갑을 개수대 옆 낮은 건조대에 모양을 맞춰 나란히 널 때 사장이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어디 초상이라도 났는 줄 알았다. 여태 무단으로 자리 비운 적 없던 놈이.
요한은 말 없이 앞치마를 풀어 제자리에 걸어놓으려고 했다.
그거 여자 모자 아니냐?
요한이 시은의 야구모자를 집어들려 할 때 사장이 날카롭게 물었다.
사장은 오랜만에 늦은 시간에 방문한 연주가 요한의 소재를 캐묻기에 친구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고 둘러댔었다. 친구 누군데요? 음, 내가 모르는 친군가 봐. 사장님이 모르는 요한 오빠 친구도 있어요? 꼬치꼬치 묻는 연주에게 함께 온 여자가 눈치를 줘서 연주가 입을 다물어서 다행이었다. 요한은 사장에게도 그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좀 걸릴지 몰라요, 통보하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져버렸었다.
나 말려 죽일래? 빨리 말 안 해? 여자랑 있었냐고!
다그치는 사장을 요한은 물끄러미 보았다.
…여자 맞아요.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며 요한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누구야 또?
사장이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대답 대신 요한은 다시 사장의 얼굴을 보았다.
사장에게는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유일할 것이다. 그는 이삿날밤 시은에게 키스해놓고 괴로워하는 자신을 걱정하고 또 혼내다가 심지어는 자신을 대신해 시은을 따로 찾아가 사과까지 해준 사람 아니던가. 그 일이 더 커지지 않고 수습된 것은 그의 공이 컸다.
그러나 요한은 침묵했다. 사장을 또다시, 터무니없는 자신의 감정으로 당혹스럽게 하고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마음의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다시 손에 든 모자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둘러댈 말을 고심했다.
여자 누구냐고!
사장이 고함을 쳤다.
…누구겠어요. 그때 쳐들어왔던 여자들 중 한 명요. 안 나오면 고소한다고 해서…
요한은 연주가 쏟아냈던 말들로부터 거짓말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뭐, 고소? 진원이한테 말했어?
아니, 괜찮아요. 그냥… 해달라는 거 해줬어요. 서둘러 나가느라고 놓고 가서… 맡아달라고 하길래.
고소를 막기 위해 그랬던 적은 없었으나 그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놈의 잘나빠진 몸뚱이뿐이었으므로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사장도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닌지라 그는 심문을 일단락지었다. 어여 가자, 피곤한 얼굴로 그는 귀가를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