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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꿈

by 지구인 Jan 13. 2025



그러나 그날부터 요한은 다시금 밤잠을 못 이루기 시작했다.


술병을 꺼내다가 그는 술기운에 또 시은에게 달려가거나 아니면 진원에게 실토할까 봐, 그리고 사장에게 걱정을 끼치게 될까 봐 죽을힘을 다해 그만두었다. 반대급부로 그의 흡연량은 급격히 늘어났다. 그는 한밤중에도 여러 번 시장통에 있는 4층짜리 상가주택 건물의 좁은 옥상에 들락거렸다.


요한과 사장은 한 층에 살림집이 하나씩밖에 없는 작은 건물 꼭대기층에 살고 있었으므로 실상 방에서 흡연하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터였다. 실제로 사장은 두세 번에 한 번은 그렇게 하다 요한에게 혼쭐이 난 후로는 그가 집을 비울 때만 가끔씩 그래왔고, 요한은 모르는 척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요한이 모르는 척해주는 것을 사장도 알지 못하는 척하고 있었다.


요한은 춥거나 덥거나 날이 궂거나 말거나 바깥을 고집했다.


아이고 저 깔끔 떨다 죽을 놈. 야 너무 그래도 여자가 싫어해. 남자가 털털하고 좀 그런 맛도 있어야지! 사장은 큰소리로 구시렁거리다가도, 하기야 네놈 얼굴에 그러기까지 하면 금상첨화면 첨화겠지 무슨… 요한에게 들리지 않게 웅얼거리곤 했다.


그의 죽은 아내도 요한만큼이나 청결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한이 그러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사장은 마치 요한이 아내의 환생인 양, 고아출신인 그녀의 알지 못할 친동생인 양 착각할 때마저 있었다.


좀도둑이 봐도 감탄할 만큼 조심스러운 요한의 움직임과 집이 떠나가라 골아대는 사장의 코골이에 힘입어, 요한의 한밤중의 잦은 실외흡연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틀째 밤, 이부자리를 펴고 나서 세 번째로 나갔다 돌아온 요한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장승처럼 서 있는 사장과 마주쳤다.


장요한. 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요한의 이름을 내뱉었다. 너 이 새끼… 그가 요한의 멱살을 잡았다. 한 대 때릴 기세였다. 요한은 차라리 사장이 세게 한 대 쳐주길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사장은 요한을 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잡았던 옷깃을 놓고 형광등을 켰다. 그리고 현관에서 불과 서너 걸음만 떨어져 있는 작은 냉장고로 이동했다. 그는 냉장고 아랫칸에서 소주병과 김치통을 꺼내어 냉장고를 마주보는 벽에 붙어 있는 식탁에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방찬장에서 소주잔 두 개를, 식기건조대에서는 젓가락 두 벌을 꺼내어 식탁에 놓았다.


사장은 의자에 앉자마자 술을 잔에 따라 벌컥 들이켰다. 얼굴을 찡그린 채 배추김치 한 쪽을 씹으며 그가 반대쪽에 놓인 술잔을 채웠다.


형, 나 술은… 요한이 머뭇거리며 말했으나 사장은 죽을병 걸린 거 아니면 와. 아니 내일 당장 죽을병 아니면 와. 작정한 듯 말했다. 요한이 식탁으로 가 앉았다. 사장의 큰 체구와, 진원까지 앉을 것을 감안해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된 4인용 식탁이었다. 사장의 전셋집은 거실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따로 없이 주방의 살림살이만으로 꽉 찼다.


요한이 앉자마자 사장이 소주 한 잔을 또 벌컥 들이켰다. 어제부터 밤새도록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들락날락… 대체 이번엔 또 뭐냐. 또 누가 협박할까 봐 그러는 거냐? 요한은 잠자코 있었다. 사장은 그를 힐끗 보더니 다시 자작하고 술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러고는 술병을 잡았다.


아예 병나발 불고 나도 술병이나 나든지. 어차피 답답해서 병날 지경이니까. 그가 소주병을 집어들자 요한이 다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다. 형… 말할 거 아니면 놔라. 요한은 손을 놓지 않았으나 바로 입을 열지도 않았다.


사장이 욕설을 뇌까리며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가자 그제야 요한은 …시은이요. 마침내 실토하였으나 사장은 못 알아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고? 되물었다. 그저께 시은 씨 만나고 온 거였어요, 사실. 요한이 조금 더 소리를 높여 말하자 사장은 시은 씨가 누구… 하다가, 그 여잘 네가 왜 만나? 소리쳤다.


맞지? 진원이랑 결혼할 여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의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 속의 작은 눈동자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요한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술을 들이켰으나 잔을 비우지는 못했다.


…그래, 뭐 만날 일이 있었다치자. 근데 왜 하필 밤늦게 만났냐? 설마 그 여자가 너 불러낸 거냐? 그래 뵈진 않던데…


아니에요. 내가 일방적으로 그랬어요. 보고 싶어서.


요한이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그럼 그때 그게… 그 낙지집서 그런 게…


사장은 순식간에 술을 확 깨게 만들었던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아니… 그땐 아니에요. 아닌 것 같아요.


요한은 시은에게 저지른 일들을 털어놓았다. 사장이 병째 술을 들이켰다. 요한은 말리지 못했다.


아니 너… 진원이가 친형제보다 더한 사이라면서 어떻게…


그러니까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특별히 예쁜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여잔데… 나한테 관심도 없는데.


요한은 흔들린다고 말했던 시은의 말 때문이라도 더 밤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지만, 그저 그 말 한 마디뿐이었고 이후로는 시은이 자신의 연락조차 거부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말했다. 사장은 괴로워하는 요한의 얼굴을 보더니 술 한 모금을 또 들이켜고 입을 열었다.


…그동안 네가 만난 여자들하고 다르잖냐. 참하고 조신해 보이고… 그리고 진원이가 장가간다니까 너도 이젠 결혼할 여자 만나고 싶어졌나 보지 뭐. 그래 뭐 잠깐 그럴 수도 있어. 근데 집까지 쫓아가서 또 그랬다는 건… 크흠!


사장이 헛기침하며 요한을 보았다. 요한은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이었다.


이 자식아, 차라리 여자들을 다시 만나 맘껏 풀고 다녀! 아님 뭐… 내가 다니는 데라도 보내줘?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것만도 아니에요.


요한은 눈을 감았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더욱 생생히 시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고 싶어요, 형.


요한이 울먹이며 말했다.


그 여자 머리, 얼굴, 손을 만지고 싶어요. 그냥, 그저 안고 싶어요. 안기고 싶어요. 안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게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머리를 기대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요한은 시은과 진원이 함께 있는 모습이 부러웠던 순간들을 생각했다. 처음엔 분명히 진원을 가진 시은이 부러웠는데, 점차 시은을 가진 진원도 부러워진 것을 생각했다.


그리움에 사무친 듯한 표정의 요한이 사장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가 아는 한 요한이 여자를 말하며 그렇듯 아련한 눈빛을 지었던 적은 없어서였다. 꼬치꼬치 캐물어야 겨우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그마저도 피하려고 하던 요한이었다. 하고많은 여자들 중에 왜 하필… 사장은 기가 막히는 와중에도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요한이 딱했다.


차라리 꿈이 없이 산다면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사장은 지난 세월로써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사별한 것만 빼면 별다른 고통 없이 나름 평온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비록 아내는 병마와 싸우다 서른 해도 채우지 못하고 갔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품안에서 행복했다고 말하며 눈을 감았었다.


불의의 사고로 하루아침에 이별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했던 아내의 말을 사장은 위안으로 삼았다. 비록 백년해로하며 자식을 낳아 기르는 기쁨은 누리지 못했으나 아내는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생생했고 아내의 사진에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는 것으로 사장은 슬픔을 덜 수 있었다.


무엇보다 차곡차곡 쌓아가는 통장잔고가 커다란 위로가 되어주었다. 이제 더는 빚에 시달리지 않고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재정 상태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바로 요한이었으므로 그가 결혼하거나 독립할 때를 위해 사장은 따로 통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서른이 넘어 뒤늦게 찾아온 요한의 열병은 완전히 잘못되었지 않은가. 사장은 휘청이는 요한을 단단히 붙잡아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너 내가 너 아무리 아껴도 그건 임마 안 될 일이야. 안 되는 건 너도 알지?


…알아요.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시은 씨도 너한테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절대 안 될 일이라고.


그럴 리가 있어요.


요한이 쓸쓸히 웃었다.


그 여잔 진원이처럼 날 가엾어하는 것뿐인데요. 그 정돈 알아요. 결혼할 사이 아니랄까 봐 그건 둘이 쌍둥이같이 똑같아요. 나는 경멸받거나 동정받거나, 둘 중의 하나인 인생이니까요.


야잇,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사장이 한쪽 발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요한은 다시 슬프게 웃음지었다.


형도 그렇잖아요? 내가 불쌍해서 거둬준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 널 동정할 만한 처지나 되냐? 그야말로 진짜 고아인 내가, 잘나가는 의사아버지 둔 너하고 어깨나 겨룰 수 있어?


날 버린 그 잘난 아부지요…


요한은 칼날을 씹는 기분이 되어 술잔을 들이켰으나 이미 빈 잔이었다. 그의 친부야말로, 요한이 맨정신으로는 입에 올리기는커녕 생각하기도 싫은 존재였다. 사장이 냉장고에서 새 술병을 꺼내 요한에게 따라주었다.  


거, 진원이 어머니가 좀 그래서 그렇지 아버님은 괜찮으시다면서. 여동생도 너한테 잘하고. 진원이야 말해야 입만 아프고. 죽은 마누라 말고는 아무도 없는 내가 널 동정하겠냐? 나야말로 네가 나 불쌍해서 같이 살아주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형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버텼겠어요.


뭐 진원이가 어떻게든 했겠지. 그러니까 너 임마, 더 안 될 일이야.


…알아요. 그때 마침 형이 오라고 해줘서 얼마나 감사했는데요… 형도 제 은인이에요. 형 아니었으면 어쩌면…


요한은 눈물 묻은 입술을 깨물었다.


요한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은 사장도 알고 있었다. 요한을 만났을 때는 사장도 겨우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때였다. 그는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태로웠던 시기를 끝내 버티고 살아낸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무엇보다 요한에게 감사했다. 형님형님하며 자신을 대접해주는 진원에게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안 될 일이다. 그가 코를 크게 한 번 훌쩍이고 나서 다시 요한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래, 그랬었지. 나는 뭐 안 그랬냐. 그러니까 이젠 우리도, 아니 너부터 남들 살듯 살아보자. 얼른 장가가라. 나도 조카녀석 좀 안아보자. 널 닮으면 얼마나 예쁘겠냐. 첫딸은 아빠 닮는다는데 딸부터 낳으면 좋겠다.


사장은 웃어 보였다.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럼그럼. 그러니까 이젠 고만 방황하고 슬슬 정착할 여자 알아보자.


사장이 술잔을 들어 보이자 요한이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잔을 부딪혔다.


형이 먼저라니까요. 홀애비 형 딸린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해요.


엥? 얘기가 그렇게 되냐…


부담되지 않겠어요, 여자한테?


그렇게 말하면 또 그러네…


사장은 순식간에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거친 턱수염을 긁적였다.


요한은 아이 같은 사장이 귀엽고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에게 또다시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는 사장은 진원과 시은을 보면 어쩔 줄 몰라할 것이다.


요한은 사장에게 토로한 것을 후회했다. 이젠 사장에게까지 못할 짓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더욱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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