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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독대(獨對)

by 지구인 Jan 16. 2025



정여사와의 약속까지는 아직 3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시어머니가 지목한 시간대는 매진이라 되는 대로 표를 끊은 탓에 시은은 점심시간 즈음 D시에 도착했다.


시은은 전날밤에도 잠을 설치는 바람에 계획보다 늦게 일어났다. 평생을 ‘아가씨’에 ‘사모님’으로서만 지내며 외모관리를 최우선목표로 두고 살아온 시모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한 꾸밈노동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미용실에 샴푸와 드라이를 예약해둔 것이 다행이었다. 하는 김에 메이크업도 고민했지만 값이 너무 비쌌다. 그는 증명사진을 찍을 때에도 사진값 외의 돈을 더 써본 적이 없었다.


진원의 친척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갈 때를 위해 큰맘먹고 구입한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차려입었으나 시은의 얼굴은 초췌했다. 최근의 그는 제대로 먹지 못했고, 먹어도 곧잘 체했다. 아버지를 닮아 위가 약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으레 겪는 일이었다. 딸의 체질을 알면서도 시은의 모친은 혼수가 생겼나 해서 걱정인지 기대인지 하는 눈치였으나 시은의 난소와 자궁은 제 할 일에 게으름을 피우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모계의 내력이었다.


오히려 시은 스스로가 임신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간단히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서였다.


나의 괴로움도, 요한의 미친 짓도 모두 멈출 것이다.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뱃속의 아이를 의지하고 요한은 그 아이에게 저지될 것이므로. 진원은 손꼽아 기다리던 둘만의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은 갖지 못하는 것은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나의 몸을 걱정하며 더 지극정성으로 대해줄 것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책임감으로 더 믿음직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정작 몸과 마음 모두 아직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었던 시은이 정혼자에게마저 고수해온 철칙 탓으로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은 낮았다.


그러므로 시은이 이제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혈기왕성한 그녀의 남자는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것이나 그녀는 제 마음을 속이고 다정한 정혼자를 이용할 정도로 약지 못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요한과의 일들을, 자신이 그에게 흔들린 것까지 모두 알게 된 진원이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을 버리려고 하다가도, 뱃속아이가 있다면 끝내 실행하지는 못할 거라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결혼이 행복하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사랑스럽기는 시은이 고집하는 방식의 피임이 실패할 확률만큼이나 낮았다. 앞날이 창창한 남자의 발목을 잡고 사랑만 받고 자라야 할 아이의 삶을 저당잡아 안위를 도모하려는 자신의 지독한 보신주의에 시은은 진저리를 쳤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한 적은 별로 없지만 스스로에게 실망한 적도 그만큼은 없었던 시은이었다. 특출나게 뛰어난 적도, 심각하게 모자란 적도 그녀의 인생에는 아직까지는 없었다. 시은은 모든 것에서 평균 또는 그를 약간 상회했다. 그 수준을 넘도록 야망이 넘치는 성격도 아니었으므로 이제까지의 삶은 다소 지루할지언정 평온했다. 시은은 파도가 너울대는 바다가 아니라 잔잔한 호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호수도 거센 비바람에는 그저 고요할 수 없었다.


시은은 자신을 격동시킬 만한 사건사고를 겪지 않은 행운을 누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왜 주기도문에는 시험을 이겨내게 해달라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지 무종교인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역사 안에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지역 빵집의 분점이 있었다.


단것을 즐기는 어머니와 빵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눈치를 주기 시작한 직장동료들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시은은 그곳에 들러야만 했다. 진원과 함께 내려왔다면 아예 역에서 한 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는 본점의 영업시작 시간에 맞춰 왔을 것이다. 실제로 진원의 본가에 인사드리러 최근에 왔을 때는 그렇게 했었다.


정작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빵들을 부모님과 동료들을 위해 사재기하듯 사들이는 시은을 보고 진원은 재밌어했다. 다 산겨? 좀처럼 쓰지 않는 고향의 말씨로 그는 웃었다.


요한이 집앞으로 쫓아오기 전에는 미리 역사 안 사물함을 확보하여 빵을 보관했다가 상경시에 되찾아갈 계획까지 야심차게 세웠으나, 그가 다녀간 후로 그 계획은 시은의 머릿속에 더 이상 자리하지 못했다. 한여름의 날씨도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대신 그녀는 모친이 특히 좋아하는 호두과자를, 귀가하는 열차를 타기 전에 사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시은은 역사 안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화사해야 할 예비 신부의 얼굴은 아니었다. 겨우 콤팩트만 바르고 입술만 칠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시은은 약속장소인 호텔의 화장실이나 파우더룸에서 챙겨온 화장도구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시은은 간단히 요기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도 건너뛴 상태였다. 모친 말마따나 눈매가 사나운 시모의 이야기를 자세의 흐트러짐 없이 경청하려면, 뱃속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줘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오랜만에 신은 힐 때문에 약속장소가 위치한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어수선해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다시 빵집의 본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서 다리가 아파오지 않는 선에서 기다리다 입장해서 빵 구경을 하고 먹을 빵을 사고, 근처의 카페에서 그 빵을 천천히 먹다보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추 한 시간은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시은은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시은은 처음으로 D시의 지하철을 탔다. 하차 후 1분여를 걸어 빵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대기인원이 많지 않아 10분 정도만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개중 작아 보이는 빵 하나만을 고른 후 금방 거리로 나왔다.


겨우 찾아낸 한 카페의 구석자리에서, 그는 빵과 커피를 앞에 두었지만 어쩐지 그 크지 않은 빵조차 잘 넘어가지 않았다. 겨우 빵 반쪽을 삼키고 나서 시은은 남은 커피를 마셔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처럼 카공족을 찾을 수 없는 카페 안의 소란스러움이 이미 곤두선 신경을 건드려서였다. 도망치듯 카페를 나온 시은은 이번엔 택시를 탔다. 목적지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10분마다 한 대씩 있었지만 혹시 앉을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서였다.


빵집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야속할 정도로 푸르렀던 하늘이 서쪽 멀리서부터 잿빛의 구름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예보상으로는 저녁 무렵 한두 시간 세차게 비를 뿌린 후 소강상태에 접어든다고 했고 서울에는 비 소식이 없었으므로 시은에게 별 영향은 끼치지 못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해 여름에는 기습성 폭우가 전에 없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가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상태와 같다는 생각에 시은은 다시 우울해졌다.


약속시간 10분 전에 시은이 지정된 장소에 들어섰을 때 정여사는 보이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혹시라도 아직 만남 중이어서 누군지 모를 어른들께 인사를 드려야 할지도 몰랐으므로 시은은 손에 땀이 났다.


결혼식 전에 한 번은 꼭 주일에 교회를 방문하여 목사 이하 교인들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정여사의 요구에, 부친 역시 장로감투를 쓰고 있는 마당에 끝내 거부하기는 죄송하다고 진원은 시은의 이해를 구했다. 시은은 자신의 친척들에게는 오는 추석 명절 때 간단히 인사드릴 예정인데 반해, 신랑 쪽에는 일일이 댁에 방문하거나 따로 식사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에 더해 교회에까지 나오라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은의 모친은 딸의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 결혼이 어떤 결혼인데 고작 인사 좀 하러다니는 것 가지고 입이 댓발이 나와 있어? 고럴 땐 꼭! 느이 할머니다. 한여사는 질색하며 혀를 찼다.


나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날아갈 듯한 얼굴로 얼마든지 다니겠다. 그치만 엄마, 말이 인사 한 번이지 완전 심층면접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한꺼번에 여러 명 보는 것보다는 너한테 낫잖아. 그리고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김서방이 오죽이나 알아서 해줄까. …엄마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야. 야, 아무리 그래도 느이 아부지만 하겠냐? 그저 엄니엄니… 하여튼 너, 천복으로 그런 남자 만나 그런 결혼 하면 그저 감사합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루다가 좋게좋게 받아들여야지, 그런 마음이면 오던 복도 달아나 이것아. 한여사는 눈까지 흘기며 딸을 나무랐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진원의 모친은 보이지 않아서 시은은 일단 카페 입구가 잘 보이는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4시가 넘도록 정여사는 오지 않았다. 시은이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을 때에야 호텔 안에서도 눈에 띄는 호화로운 차림새의 정여사가 도도한 걸음걸이로 카페에 들어섰다. 그러나 정여사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일어선 며느리와 눈을 마주치고서도 그녀에게 가지 않았다. 정여사는 예약석 팻말이 놓여 있는 창가 쪽 자리로 가며 시은에게 손짓을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인사를 받으며 정여사는 며느릿감의 겉모양을 샅샅이 훑었다. 몸선을 살리는 여성스러운 원피스가 잘 어울렸고 단정한 머리 모양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다소 파리해 보이는 얼굴은 성에 차지 않았다. 정여사는 서둘러 지인들을 배웅했던 것이 역시 잘한 일이었다 여겼다.


너무 과하게 하는 거 아니니?


시은이 그대로 서 있자 정여사는 다이어트 말이다, 얼굴이 그게 뭐니, 하고 핀잔을 주었다. 이어 앉아라, 라는 말에 시은은 조심스레 착석했다.


굶지만 말고 운동하면서 해라. 나중에 골병들어.


네… 주의하겠습니다.


정여사의 지적이야 각오한 바였으나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자신의 모친이 했던 말과 같아서 시은은 왠지 울컥했다. 같은 말인데 친모에게는 알아서 할게, 라고 짜증 섞인 대답을 하고 시모에게는 공손한 대답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기가 막혀서였다.


우리 아들한테 전화왔더라.


진원의 이야기가 나오자 시은의 가슴이 따끔했다. 그럼 잘 다녀와, 서울에서 열차에 타기 직전에 전화를 걸어온 그의 따뜻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했다.


너는 얼마나 날 마귀할멈처럼 말해놨길래 내 아들이 너한텐 무슨 말도 못하게 해놨니? 이건 뭐 살얼음판 걷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시집살이는 옛말된 지 오래고 며느리살이하는 세상이라지만.


시은이 당혹스러워하자 정여사는 힐끗 보더니 여기 빙수 괜찮은데 먹을 테니? 라고 물었다.


아… 저는 따뜻한 차가 좋겠습니다.


제대로 먹지 않은 채 계속 에어컨 바람을 쐰 탓인지 약간의 오한이 느껴지는 것 같아 시은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애에 대해 넌 어디까지 아는 거니.


정여사가 직원이 정중히 서빙한 후 돌아가자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부모님들끼리 친분이 있으셨고 한 동네 살아서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다가… 요한 씨 부모님께 사정이 생겨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 정도밖에는요.


내가 친분이 있었던 건 그애 엄마가 아니었다. 그 아버지란 인간은 더더욱 아니고.


시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여사가 차갑게 내뱉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며느리는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얘, 등 펴.


정여사가 재빠르게 지적하고는 우아하게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시은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따라서 찻잔을 들었다.


그애 얘길 하려면, 그애 엄마 얘기부터 해야 한다.


정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착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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