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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삼십 년 전에 (1)

by 지구인 Jan 20. 2025



요한의 친모는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나 자랐다.


시외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외삼촌에게 입적되었고 생모는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여섯 살짜리 딸을 두고 싫은 시집을 가야 했다. 드물게 친정나들이를 할 때면 딸아이를 끌어안고 구슬프게 울던 생모는 그러나 새로운 자식들이 태어나자 점차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천덕꾸러기 모녀에게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친정어머니의 삼년상이 끝나자 생모는 아예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눈칫밥을 먹으며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종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며 어렵게 간호조무사 공부를 하고 있던 요한모는 실습차 가게 된 병원에서 단박에 원장의 눈에 띄었다.


간호사도 아닌 조무사 관련해서는 실제 채용까지도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던 진원부에게 일임하고 있던 원장은 실습생들이 의례차 인사하러 간 부원장실에 갑작스레 들이닥쳤다. 그는 실습생들을 일일이 원장실로 불렀고, 요한모에게는 신상을 꼬치꼬치 캐물은 뒤 병원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나아가 조무사 자격증을 따면 바로 채용하겠다는 약속까지 해주었다. 순진한 요한모는 환자들에게 인기 많고 호탕하다고 전해들은 원장님이 인정이 많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원장은 호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방탕한 것으로도 유명짜한 사람이었다. 많은 잘못된 교인들이 그렇듯 그도 주일에 헌금하고 회개기도를 하는 것으로 스스로 면죄부를 삼았다. 물론 요한모는 원장의 사생활에는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아직은 어렸던 그녀는 원장이 은근슬쩍 들이대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답답해진 원장이 아예 그녀를 따로 불러 대놓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자 그녀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반드시 결혼할 때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이제는 얼굴도 희미한 생모가 말귀도 알아듣지 못할 어린 자신을 안고 반복해 읊조리던 말만이 떠올랐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하여 요한모는 서로 좋아했던 고향의 첫사랑에게도 손 잡는 것 이상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당시의 원장은 기러기아빠 처지였다.


그 시절 흔한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그도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에서 형제자매 많은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악바리처럼 공부하여 국립대 의대에 진학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다소 병약한 무남독녀를 믿고 맡길 의사 사윗감을 찾던 재력 있는 처가와 열쇠 세 개는 받고 결혼하려던 원장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혼인한 처는 약한 몸으로 죽다 살아나며 겨우 낳은 외동딸을 데리고 미국에 나가 있었다.


원장은 아들도 아닌 딸자식 교육 때문에 조기유학까지 나가는 아내가 탐탁지 않았다. 다행히 공부머리는 자신을 닮았으니 열심히 해서 뒤를 이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훗날에는 외손자가 삼대째 업을 이어주면 좋겠다 싶었다. 늘 의사의 손자요 아들이었던 후배를 부러워해 온 터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금지옥엽 외동딸을 남편처럼 고생스럽게 공부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딸은 귀족처럼, 여왕님처럼 고상하고 우아해야 했다. 자신의 꿈이었던 영문학과 여교수 정도가 되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처의 고집을 원장이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집과 병원, 외제차까지 모두 처가에서 받고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장이 벌어오는 돈은 시골의 홀어머니와 동생들 몫으로 많은 부분이 지출되었다.


딸아이가 태어난 후 각방까지 쓰게 되면서 요한부는 다시금 슬슬 유흥업소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를 묵인한 처의 요구는 단 하나, 밖에서 자식을 낳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으며, 그와 관련한 어떤 작은 소란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아내의 협박에는 원장도 동조했다. 그러나 요한모의 청초한 미모에 원장은 아내와의 약속도 잊어버렸다.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요한모를 원장은 당장에 범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않는 그녀를 매일같이 찾아가는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좁은 사글셋방에서 함께 살던 ‘언니’는 원장에게 매수되어 그가 올 때쯤엔 알아서 자리를 뜨더니 이내 원장에게 살림을 차려달라 요구하라고 요한모를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한모는 물질공세에도 완강히 버텼고, 결국 원장은 불륜을 저지르는 유부남들이 그러하듯 불행한 결혼생활을 토로한 끝에 이혼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그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는 햇볕 잘 드는 방 두 개짜리 신축빌라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납치되다시피 새집으로 옮겨진 요한모에게는 그녀가 감히 꿈도 꿔본 적 없는 수준의 생활비 봉투가 주어졌다. 그는 이미 부유했던 아내에게는 사줄 필요가 없었던,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사들고 요한모에게 무릎까지 꿇었다.


요한모는 어떻게 그를 거부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원장의 반지를 기꺼이 받아들이지도, 그렇다고 확실한 거절의 의사를 밝히지도 못한 그날밤에 그녀는 원장의 여자가 되었다. 그녀가 처녀임을 확인하고 만족한 원장은 그녀에게서 자식이 생겼으면 싶었다. 본처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아들을, 순진하고 젊디젊은 그녀에게서 낳고 싶었다. 그의 처는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몰래 불임수술을 해버렸다. 그 대가로 병원의 명의를 넘겨받았지만 허탈함은 채워지지 않던 터였다. 이제는 병원도 확실히 자리가 잡혔고, 호적에만 올리자고 하면 지가 어쩔 건가, 그는 호기롭게 굴었다.


내연녀의 임신에 원장은 기뻐하며 성별확인을 기다렸고, 고대하던 아들임을 확인하자 아무 걱정 말고 낳으라고 불안해하는 여자를 안심시켰다. 그때쯤엔 요한모도 원장이 처가 덕이 없었다면 제법 큰 병원을 도저히 차릴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까지만 책임지겠다고 했던 외갓집에 부른 배를 하고 돌아갈 수도 없었고 아이를 죽일 수도 없었다.


뱃속아이의 심장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본능적인 모성을 느낀 그녀는 아이를 자신처럼 아비 없는 자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발 이혼해주어야 할 텐데. 사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어차피 부부의 정은 없는 사이이고 친정도 든든하시니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제게 양보해주세요. 요한모는 죄책감과 절박함을 동시에 느끼며 신께 기도했다.


마침내 아이를 낳고 그녀는 펑펑 울었다. 아이가 생각보다 너무 작고 어여뻐서. 원장이 바라던 아들이 틀림없어서 기뻤고 친정엄마도 없이,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아서 슬펐다. 그녀는 아기의 얼굴을 끝없이 들여다보며 울고 또 울었다. 제 어미만 빼닮은 것이 약간 서운하긴 했으나 나이 오십을 바라보며 얻은 아들에 원장은 만족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혼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요한모는 나이 많고 돈 많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감히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도 못했으므로 그저 눈물만 삼키며 아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나마 자신과 달리 아들은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간 것이 다행스럽고 감사할 뿐이었다.


원장은 혼외자의 이름을 항렬의 돌림자도 쓰지 않고 지었다. 간음의 결과로 태어난 아들의 앞날에 예수를 축복한 세례자 요한은 물론이고 예수가 총애한 사도 요한 모두의 보우를 바란, 나름의 부성애였다. 그리고 아들을 보기 위해 점심시간에도 빌라로 달려가곤 했다. 처가에서 차려준 병원에도 여전히 아내 명의인 집에도 아내의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을 늘 신경쓰던 철두철미한 원장도 늦게 얻은 아들자식과 그를 낳아준 미모의 젊은 상간녀의 존재에는 그렇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결국 원장이 두집살림을 하며 자식까지 낳은 사실은 해외에 있던 그의 처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리고 그를 알린 장본인이 바로, 정여사였다.


…그렇게 악연이 시작된 거지.


정여사가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말했다.


보통 이 정도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특히 여자들은 십중팔구 원장과 그 상간녀를 욕하느라 목청을 높이고 나머지 극소수는 원장을 파렴치한이라고 욕하며 요한모를 동정하곤 했다. 그러나 시은처럼 별다른 표정의 변화도 없는 경우는 정여사의 기억에는 없었다. 하나뿐인 며느리가 저 모양이니… 대체 저런 나뭇토막 같은 애가 뭐가 좋다는 건지. 그이는 자신도 모르게 양눈 사이를 찌푸렸다가, 주름이 걱정되어 황급히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시은이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것은 그저 겉으로만 그러했을 뿐이었다. 고작 스무 살을 막 넘긴 고아나 다름없는 여자가 삼십 년 전 서울도 아닌 곳에서 살아보려 발버둥쳤을 모습이 시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본처가 알았으니 정여사를 비롯해 어쩌면 여러 여자들에게 심하게 당했겠지, 주부들이 좋아하는 막장드라마에서처럼.


시은은 아예 남의 일이었다면, 그저 드라마에서 본 일이었다면 자신도 정여사에게 망설임 없이 동조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을 낳은 여자의 일이다 보니 요한에 대한 동정심까지 겹쳐 그녀를 마냥 비난할 수가 없었다.


정여사는 며느리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뭐라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불이 난 속을 달래고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금세 물이 바닥났다. 그녀가 더 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시은이 재빠르게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정여사는 조금은 마음이 풀어졌다.


여자애가 아양도 떨지 모르고 무덤덤하기만 하여 다정다감한 아들이 더 아까웠는데, 눈치까지 없진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 잘난 내 아들이 널 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정여사는 남은 이야기를 마저 풀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정여사는 동향 출신의 선후배 관계인 남편끼리의 친분을 차치하고라도 원장 사모와 자매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남편을 따라 낯선 시집을 왔을 때 이웃들에 인사를 시켜주고 지역사회에 소개해주고 교회에까지 전도한 이가 바로 원장의 정처였다.


이미 홀시어머니가 같은 교회의 독실한 신자이긴 했으나 원장처가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정권사는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엄격한 청교도와 같았던 시모와 교회까지 함께 다니는 것은 부잣집 고명딸로 부친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천방지축으로 자란 정여사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원장의 아내는 당연히도 정여사를 앞세워 요한모에게 쳐들어가 무섭게 잡도리를 했다. 자신에게는 친절했으나 그 남편에게는 늘 까칠하고 예민하게 굴었고 무엇보다 얼마쯤 기력이 없어 보였던 그 언니가 얼마나 힘이 세고 욕도 잘하는지, 정여사는 깜짝 놀랐었다. 첫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새색시 같은 수줍음이 아직은 남아 있던 그때의 젊은 정여사는 실상 뒤로 물러서서 보고만 있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울기만 하는 요한모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뜯기고 옷이 찢기고 처연하게 예쁜 얼굴에 생채기가 나고 온몸이 두들겨졌다. 아직 채 백일도 안 된 그녀의 자그마한 아기가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정여사는 언니를 말렸고, 아기의 젊은 엄마는 아이를 끌어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유행가를 속삭이듯 부르며 아기를 달래었다. 헝클어져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길고 가냘픈 목이 애처로웠다. 지난 봄에 출산한 정여사는 그 서글픈 광경을 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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