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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말할 수 없기에

by 지구인 Jan 06. 2025



진원에게 고부간의 만남을 알리는 통화를 마친 시은은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시어머니 정여사에게 어렵게 전화를 하고, 이후 만날 일정을 확정하는 데에도 꽤 애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진원에게 알리는 일은 너무도 수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오랜만에 걸려온 자신의 전화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정혼자의 들뜬 목소리를 듣자 시은은 가슴에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순간 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그녀는 온힘을 다해야만 했다.  


왕성한 사회활동과, 그를 위한 외모관리의 꼼꼼한 스케줄 탓에 정여사는 며느리가 될 여자에게 한두 시간을 내어주기에도 일정이 빠듯했다. 결혼을 핑계로 또다시 연차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시은이 조심스레 주말을 말했을 때 정여사는 교회활동으로 주말이 더 바쁘다며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어찌어찌 겨우 잡은 시간대가 금요일 오후 4시였다. 정여사는 점심약속을 잡은 5성급 호텔의 1층 레스토랑 겸 카페로 오라고 며느리에게 지시했다.


처음으로 단 둘이 만나는 자리였으나 정여사는 며느릿감에게 굳이 집으로 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굳이 함께 밥을 먹자고도 하지 않았다. 상대와 대화의 주제를 고려했을 때 시은도 식사자리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진원과 요한이 자라난 집에서, 어린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좇아가보고도 싶었던 그녀는 시어머니가 집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웠다.


이제 시은이 고민해야 할 것은 시어머니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한 옷차림이었다. 그는 아픈 요한이 걱정되어 연락도 없이 신혼집으로 왔을 때의 시누이의 화사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날이 시은이 하랑을 본 중에 가장 많이 꾸민 모습이긴 했지만, 다른 때에도 하랑은 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딜 내놔도 나무랄 데 없이 잘 가꾼 모습이었다. 아마도 모친의 영향이리라 시은은 짐작했다.


그 나이 때의 시은은 후드티에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백팩을 둘러매고 다녔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교복 입던 시절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그녀였다. 만약 그렇게 다니던 때에 진원을 만났다면 그와 맺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시은은 옷장에서 옷을 고르며 생각했다.


정여사가 지목한 장소에 집에서부터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에 이어 열차까지 갈아타야 했고, 약속시간에 맞춘 열차표를 구하지 못한 탓에 역 근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시은은 옷차림은 둘째치고 신발이 고민이었다.


침대에 누울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지났지만, 시은은 진원과의 통화를 완료한 데 이어 옷차림까지 정해두어야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의 일정이야 당일 도착해서 짜보아도 시간은 넉넉했다. 적어도 D시에 내려가는 그날까지의 며칠만이라도 요한과, 그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잊고 싶은 것이 시은의 작은 소망이었다.


그때 시은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진원이리라 생각한 송신자는 그러나 저장되지 않은 연락처의 소유자였다. 일부러 저장하지 않았음에도 시은의 뇌리에 남아있는 숫자들이 분명했다. 시은은 애써 전화기를 외면했다.


전화기의 진동이 멈추고 잠시 후 메시지가 올 때의 진동이 울렸다. 시은은 전화기를 꺼버릴 결심으로 그것을 들어올렸으나 반사적으로 메시지를 확인해버렸다.


- 집앞이야.


시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그와의 꿈을 꾸며 그의 연락을 자신도 모르게 기대했을 때 그는 숨소리 한 번을 들려주지도 마침표 하나를 보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를 의식의 영역에서 잠시나마 몰아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그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감추었던 존재를 드러냈다. 그를 처음 만난 다음날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나타난 것과 똑같이.


손에 든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시은은 요한이 뛰어올라올 것만 같아 두려워져서, 입술을 깨물고 벽걸이에 걸린 동네마실용 옷을 집어들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시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야구모자를 살짝 눌러썼다. 그러고는 방문을 열고 나가 현관으로 향했다.


김서방 왔대?


식탁에서 계산기와 함께 가정의 재무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한여사가 돋보기 안경을 내리며 물었다. 순간 시은이 멈칫거렸으나 곧 어, 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운동화를 발에 꿰었다. 시은은 현관문을 열며 요한이 이번엔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발길은 요한을 향하고 있었다.


요한은 시은네 공동현관에서 나와 단지의 정문으로 향하는 길목의 인적이 없고 어두운 곳에 서서, 전에 시은이 전화기를 떨어뜨리기 직전처럼 흥분되고 불안정한 얼굴로 전화기에 글자들을 입력하고 있었다. 너무 집중한 탓에 그는 시은이 다가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나 이제 그쪽 더 안 보고 싶은데요.


시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요한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원이 시은과의 통화를 마치고 얼마 안 있어 떠나자마자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이곳으로 왔었다. 진원에게서 시은이 정여사를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전해듣는 순간, 그는 목덜미의 솜털들이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내 사연을 알아내면, 그 비루한 출생을 알아내면, 시은도 나를 경멸하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지금보다 더욱 거리를 두려고 할 거다. 진원에게 내가 저지른 미친 짓들을 말하고 그런 출생이어서 그렇다고 욕할지도 모른다. 요한의 뿌리 깊은 자격지심이 그렇게 발동했고 그래서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한은 오래된 가로등의 불빛이 희미한 탓에 뚜렷이 보이지도 않는 시은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그 모든 이유들은 그녀를 보려고 한 핑계였음을 깨달았다. 그 무엇보다 시은이 보고 싶어서 야간할증까지 붙어 손 떨리게 비싼 택시값을 치르고 달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시은을 다시 끌어안고 싶어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시은은 요한에게서 두 걸음은 족히 떨어져 서 있었다.


그것이 시은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이성적인 행동이었다. 시은 역시 요한처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그의 늘씬한 체형만 보고서도 그를 알아본 순간 자신이 그를 만나기를 기다려 왔다는 것을 알았다. 결코 앞으로는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와의 부적절한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헛된 맹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나 그를 입밖에 낼 수는 없었기에 시은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둘 다 스스로의 감정이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마주보고 선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는 왜 만나러 가는 거예요.


차마 널 보고 싶었어, 라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요한은 그렇게 이곳에 온 원래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바를 말했다. 그의 감정에 비해 목소리는 안정적이었다.


시은은 의외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그제야 좀전에 통화한 진원이 요한네 가게에 있다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나에 대해 물어보려고 그러는 거죠?


요한이 한 발짝 시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시은이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요한은 그녀에게 다시 다가서며 이어 말했다.


날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어요? 내 밑바닥까지 보고 싶어요?


요한은 생모와 계모를 거쳐 양모까지 가졌지만 그들 모두에게 버림받은 저주받은 운명을 되새겼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요한에게 행복이란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실제로는 본 적이 없었다. 사막을 가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것도 같았지만, 그는 이미 숨쉬기 힘든 사막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머나먼 미래의 인류가 사는 사막행성이 나오는 SF영화를 진원과 함께 관람했을 때 그는 등장인물들이 타고 다니던 거대한 사막벌레들에 매료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넓디넓은 모래바다를 거침없이 헤치고 나가는 그들을 보았을 때 그는 그 벌레들이 아름다웠다. 부러웠다. 정확히는 그 벌레들 위를 타고 다니는 인물들이 부러웠다. 자신에게도 그 벌레들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러지 말아요.


그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던 진원을 가져가버린 여자에게 요한이 더욱 바짝 다가섰다.


궁금한 게 뭔데. 나한테 물어봐. 다 말해줄 테니까!


요한이 시은의 한쪽 팔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시은이 그의 팔을 뿌리쳤다. 여자는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어디 카페라도 가요.


어둠이 내려앉듯 밤에는 소리도 땅으로 가라앉는다. 여자는 점점 커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리는 것이 두려워서 그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한 게 뭐냐고. 물어보라니까.


나더러 어쩌라고!


시은의 걱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요한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으나 이번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요한이 움찔하는 사이 시은은 혼잣말하듯 이어 말했다.  


…난 이 결혼 지켜야 돼요. 근데 요한 씨가 자꾸 방해하고 있잖아요. 자꾸 선을 넘고 있잖아요.


시은의 머릿속에 열에 들떠 요한이 저지른 일이 또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그 장면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 상대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말을 이었다.  


…어머님께 얘기 듣고 결정할 거예요.


뭘.


……


진원이한테 말할지 말지? 날 떼어놓으려고.


……


그래, 말하자. 내가 말할게. 지금 당장 말할 거야.


안 돼요!


넓은 보폭으로 성큼 발을 내딛는 요한의 한 팔을 시은이 양손으로 붙잡았다. 동시에 요한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끌어안으며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그 바람에 시은의 볼캡이 땅에 곤두박질쳤다. 진원이 이사하던 날 밤에 요한이 그랬듯 이번엔 시은이 벼락같이 신경세포에 내리치는 감각을 경험했지만, 시은은 본능에 굴하지 않고 그를 밀쳐내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자, 됐지? 나 술도 안 마셨고 아프지도 않아. 실수가 아니야.


요한이 거친 음성으로 내뱉었다.


어서 말해! 진원이한테 다 말하라고!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뺨을 쳤다. 온힘을 다해서. 남자는 아프기도 하고 정신이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한쪽 뺨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여자를 다시 보았다. 여자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남자의 심장에 금이 그어졌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보잘것없는 자신 때문에 우는 것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음을 그는 깨달았다.


나 좀 내버려둬…


여자가 울면서 말했다.


흔들지 말라고… 겨우 버티고 있다고… 제발!


여자는 남자가 붙잡을 틈도 없이 왔던 쪽으로 뛰어가버렸다.


남자는 멍하니 서서 듣는 순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여자의 말을 곱씹었다. 흔들린다고? 나한테? 왠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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