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 손에 들린 가방이 거추장스러웠고 신발도 운동화가 아니었기에 시은의 갑작스러운 달음박질은 이내 멈춰졌다. 고작 수십 미터 정도만 달렸을 뿐이었다.
시은은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앉아 숨을 내쉬었다. 당장에 연인을 만날 생각은 사라졌기에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는 눈물자국을 거칠게 닦아낸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허벅지 사이에 얹은 채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약혼자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만약 이 결혼이 잘못된다면 특히나 엄마에게 못할 짓이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명확히 알게 된 시은은 생각했다.
진원은 좋은 남자다. 요한도 말했듯이, 나보다 훨씬 좋은 조건의 여자를 골라 장가갈 수 있을 정도로 잘났고. 너무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거야. 아마도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그는, 또한 요한이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역시 요한도, 친형제처럼 사랑하겠지. 그러니 어쩌면 지금 이 불미스러운 상황을, 대범하게 넘길지도 몰라. 그냥, 그냥 한때의 욕정으로, 호르몬의 농간이라고 넘겨줄지도 몰라. 아니 그러기엔… 진원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남자와도 그런 꿈들을 꾼 적은 없었는데… 그리고 어쩌면 반대로, 상대가 요한이니 진원은 오히려 더 괴로워할지 몰라. 예전 여자친구 사건도 있었는데 나까지… 더 상처받을지 몰라.
시은은 진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진원을 볼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요한의 손길이 떠올라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다정한 약혼자를 서운하게 하고 걱정시켰던 일들을 생각했다. 차라리 요한으로 인한 성적 흥분을 진원을 통해 풀 수 있다면 좋겠다는 과감한 생각을 시은은 여러 번 했다. 배우자가 아닌 상대에게 느낀 그런 상태를 윤리적으로, 현실적으로 그 상대와 실행으로 옮길 수 없으니 그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 법적 상대와 잠자리하여 해소하는 것을 드라마에서 두어 번 본 적이 있던 탓이었다.
그랬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진원은 요한에게 목이 졸리고 달려갔던 그날처럼 그저 좋아했을 텐데. 시은은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진원에게 친형제 같은 요한이었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시은 자신이 그 드라마들에서의 인물들처럼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 누구보다 시은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형이었다.
시은이 요한에게 끌리는 것은 생물적 본능이었고 진원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그 손길을 거부하는 것은 학습된 윤리의식이었다. 시은의 갈등은 그 어느 쪽에도 충실하지 못했거나 그 양쪽 모두에 충실했기 때문에 비롯하였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알고는 있었으나 문제를 파악한 것이 해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진원과 요한, 그리고 자신까지 세 사람의 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었다.
어쨌든 결국은, 요한을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한다. 그것만은 확실해.
시은은 진원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 말하고 절교 당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했다고 요한이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에게, 진원에게 말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던 것도 기억났다. 그저 하는 말이고 허세였다면, 못 이기도록 술을 퍼부은 끝에 며칠을 앓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은은 정수리와 관자놀이 사이의 머리칼을 양손으로 세게 잡아올렸다. 이제 와 그런 생각을, 이제라도 요한이 진원에게 털어놓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다는 비겁한 생각을 한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병까지 난 요한을 도저히 증오할 수 없었고 외려 연민했던 시은의 관대함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대신 어떻게든 요한으로 인한 더 이상의 혼란 없이 무사히 결혼식을 치르고, 달콤한 허니문을 다녀오고,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을 즐기고픈 자기중심적 욕망만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은 자신만의, 진원과 둘만의 일도 아니었다.
법적 구속력을 갖는 ‘고도의 사회적 행위’임은 차치하고, 당장 시은에게는 방금 전 보았던 어머니의 즐거워하던 모습이 무엇보다 큰 구속력을 행사했다. 시은은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한여사 자신의 결혼식 이후로 가장 많이 꾸민 모습일 그녀가 기쁜 마음으로 화촉에 점화하고, 뿌듯한 얼굴로 신랑신부를 바라보고, 신부인 자신의 옆에 서서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길 바랐다. 그를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시은은 요한에게도 ‘엄마’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큰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불륜관계에서 아이까지 낳았다는 요한의 어머니는 대체 어떤 여자였을까. 시은은 그 순간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진원도 말해주지 않은 요한의 과거를, 정확히는 진원모와 요한이 불편한 사이가 된 원인을 알 수 있는 열쇠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그 열쇠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진원의 어머니일 것이다.
시은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궁금해했던 요한의 과거를 듣게 되면 진원이 왜 그토록 그를 보살펴주려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과연 진원의 요한에 대한 마음은 무엇일까. 어디까지일까.
요한을 만나고부터 생겼던 호기심이 충족될 기회를 얻게 되자 시은은 묘한 흥분감을 느꼈다. 마치 즐겨보던 드라마 시리즈의 다음 시즌이 업로드된 것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처럼. 시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인가 해볼 만한 것이 생긴 것만으로도 기운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당장 내일 전화기를 고쳐야겠다고, 만약 그게 어려우면 바로 새로운 전화기를 구매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시은은 고부간이 될 정여사, 또는 정권사에게 만남을 요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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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웬일이니. 먼저 연락을 다하고.
시은이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마침내 정여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화장대 앞에서 외출 준비 중이었다.
대형교회의 권사이자 지역에 이름난 내과의원장 사모님으로서, 정여사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회활동을 하느라 대단히 바빴다. 그를 위해 틈틈이 미용실과 피부과, 단골 옷가게 등지에도 들러야 했기에 그녀의 하루하루는 명의로 소문난 남편보다 훨씬 다채롭게 분주했다.
정수리 부분에 굵은 헤어롤을 말고 있던 그는 ‘며느리’라는 글자가 전화기 화면에 뜨자 눈을 의심했다.
만나고 헤어진 뒤라거나, 자신이 무언가를 보내준 때와 같이 예의차 필요한 때가 아니면 아들의 여자는 도통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하기야 가족 단톡방에서도 이른바 ‘눈팅’만 하고 있긴 했다. 원래 말이 많지 않아요, 전 그래서 좋은데요. 애저녁에 그 여자의 남자가 돼버린 아들내미는 웃으며 대꾸했고 남의 편이란 사람은 조신하니 좋구만 뭘 그래, 말이 많으면 탈도 많은 거예요. 벌써부터 며느리 편이었다.
속타는 자신의 마음을 하소연할 이는 귀염둥이 딸내미뿐이었다. 그러나 그 늦둥이 막내마저도 대학입학과 함께 상경한 후로는 아무래도 전 같지가 않았다. 교회 때문에라도 주말에는 꼬박꼬박 내려오던 하랑은 학업을 핑계대고 본가에 오지 않는 주말이 은근슬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올해 여름방학에는 계절학기를 들어야 한다며 늑장을 부리기까지 했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딸을 데리고 교회에 나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즐거움 중 하나였던 정여사는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을 믿었던 딸에게마저 통감하게 되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남편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아예 서울로 올라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권사’로서 책임져야 할 교회활동이 많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정여사는 진작에 고집불통 남편은 포기하고 자식들에게 갔을지도 몰랐다.
네, 어머님. 죄송합니다…
시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시모와의 통화를 위해 당일에는 그 좋아하는 커피도 시은은 마시지 않았다. 뭐라 말할지 적어가며 연습하고, 전화를 걸기 전에는 심호흡도 여러 번 했지만 시은의 심장은 벌써부터 빠르게 뛰었다.
됐다. 그래, 무슨 일이니?
정여사는 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여 화장대에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머님, 혹시…
시은은 침을 삼켰다. 준비한 대사를 읊을 차례였다.
요한, 장요한 씨에 대해 제게 해주실 말씀 없으세요?
정여사는 팩트를 찍어바르던 손길을 멈추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저어하는 이름 석 자가 며느릿감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 못한 까닭이었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그 얼굴의 절반만이 톤이 밝아져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정여사는 그렇게 내뱉고 다시 화장을 시작했다. 문득 눈가에 주름이 늘어나 보였다. 정여사는 보톡스를 맞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진원 씨는 제게 요한 씨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 했어요. 어렸을 때 같이 살기까지 했으니 형제나 다름없다구요.
시은이 다급히 다음 대사를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고심하며 타이핑한 말들이 인쇄된 A4용지가 들려 있었다.
내 아들 고집을 누가 꺾겠니. 난 두손두발 다 든 지 오래다.
정여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임신 네 번째만에 얻은 금지옥엽 외아들은 요한의 일로 인해 철이 들면서부터 자신에게 냉랭하였다. 그 때문에도 정여사는 요한에게 이가 갈렸지만, 아들과 더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아들이 요한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두고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네, 그래서 저도 몇 번 만났습니다. 진원 씨가 소개하는 자리에서, 그 사람이 일하는 술집에서, 진원 씨가 이사하는 날에도 도와주러 왔었구요.
그래, 들었다.
요한이 집을 완전히 떠난 뒤부터 진원은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로 그의 이름은 되도록 꺼내지 않았지만, 결혼을 작정한 뒤로는 그마저도 잘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데리고 오려고 작정하기라도 한 듯 굴었다. 살림꾼인 요한에게 이삿날 도와달라 불렀다고, 그녀의 아들은 묻지도 않은 말을 자랑스럽게 했었다.
최근에는 요한 씨가 좀 아파서 진원 씨 집에서 며칠 지냈구요.
신혼집에, 식 올리기도 전에 그애부터 들였다는 거냐? 아니 그래 너는 그걸 그대로 보고 있었니?
기가 막힌 정여사가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진원 씨가… 저한테 말도 안 하고 그랬더라고요. 제가 기분 나빠할까 봐…
당신의 아들이 요한을 집에 들인 것에 대해 자신을 타박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시은은 약간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그래, 말 잘했다. 기분 나쁜 게 정상이지. 코로나 이후로는 먼저 살기부터 하다가 나중에 식 올리는 일이 많아졌다지만, 그건 쌍놈의 집구석이나 그러는 거고, 그래서 내가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았니? 진원이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그것만은 안 된다고도 했다. 그랬더니 너나 너희 부모님도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하길래 그거 하나는 쓸 만하다 했더니. 우리 하랑이가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도 식 올리고 초대받아 가는 게 예의라고 못 가게 했는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남남인 그애부터 들여놨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정여사는 외출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흥분하여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댄 채 말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