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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산산이 부서진

by 지구인 Dec 19. 2024



시은의 집 근처 카페에서 하랑은 초조하게 시은을 기다렸다. 하랑의 예비 올케는 이유도 묻지 않고 자신의 집 근처로 와줄 수 있는지만 물어왔다.


하랑은 카페에 들어선 시은이 보이자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이에서 본 시은의 눈밑이 거무스름했다. 예의바른 하랑은 직장 다니면서 결혼 준비하느라 피곤한가 보구나… 속으로 생각하고만 말았다. 하랑은 요한을 보려고 오빠네 신혼집에 찾아갔을 때도,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의 요한을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느라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랑이 어렵게 요한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자 시은은 그런 것 같았다고, 그날 하랑의 요한에 대한 행동거지를 보고 눈치챘다고 조심스레 답했다. 그러나 하랑이 요청하기도 전에 도와주긴 힘들다고 바로 선을 그었다.


진원 씨가 도와주기로 한다면 모를까 내가 먼저 나서기는… 하랑 씨 말대로 부모님도 반가워는 안 하실 테고… 내 입장이 그렇네요.


시은은 차분히 말했다.


네에… 저도 크게 기대는 안 했어요. 언니께 부담드리고 싶지도 않고요. 그냥… 그냥 제 얘기를 들어주셔서… 너무 답답해서 그냥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어서요.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하랑은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말했으나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가 붉어졌다. 시은이 눈물을 감추려 하는 하랑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몇 살이라도 더 먹었고 하랑 씨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꼰대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지만요,


시은의 말에 하랑은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 사람, 요한 씨… 그 사람의 현재에 대해, 하랑 씨가 알던 옛날의 그 사람 말고 요즈음의 요한 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누구와 만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까지 알아요?


그렇게 물으며 시은은 하랑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시은은 아마 스스로가 어린 시누이보다 훨씬 더 요한에 대해, 적어도 자신을 대면한 이후의 그에 대해서는 더 많이 잘 알 것이라 자신했다. 무엇보다 요한은 하랑에게 하듯 시은을 피하기는커녕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과 행동으로써 시은을 놀라게 하고 당혹스럽게 해왔다. 요한의 모든 것을 시은도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진원에 대한 평범치 않은 감정이나 복잡한 여자관계, 그리고 바의 사장이 요한을 친동생처럼 아낀다는 것 등은 하랑은 결코 자신만큼은 알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랑은 시은의 물음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눈가 대신 얼굴을 붉혔다.


나는 하랑 씨만큼 그렇게 오랫동안 누군가를 짝사랑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첫사랑도 언제 누구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고요. 근데 그런 말이 있던데요. 짝사랑은, 특히 오랜 사랑은 그 상대보다는 그를 사랑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일 수도, 그렇게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객관화하기는 힘드니까요. 나도 다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하랑 씨가 너무 아까워요. 나조차 이런데 부모님은 오죽할까요. 하랑 씨도 그걸 아니까 오빠가 아닌 나한테 털어놓은 거 아니에요?


시은은 청산유수처럼 나오는 자신의 말들에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약혼자의 절친과 나뒹구는 더러운 꿈을 매일같이 꾸면서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 아이는 순수한 마음이라기도 하지, 넌 대체 뭐니. 시은은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네에… 그러네요. 언니 말이 맞아요. 제가 현재의 오빠에 대해 아는 건 피상적인 것들뿐이네요. 그치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도 하잖아요. 어렸을 때 제가 본 오빠의 모습이 진짜 오빠라고 저는 믿어요. 누구보다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요. 오빠가… 평범한 환경에서, 친부모님 곁에서 자라지 못한 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하랑은 어느새 물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시은은 하랑의 당돌한 반격이 갓 스물을 넘긴 풋풋한 나이답게, 맑고 싱그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잣집 귀한 딸로 부족함 없이 자란 하랑은 원하든 원치 않든 주어진 환경을 이겨내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처럼 어렵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개념을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유복하진 않았어도 크게 부족하지도 않게 자란 나도, 별다른 야망도 없던 나도 자라며 아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기구한 팔자의 요한이야… 시은은 착한 시누이가 외모뿐 아니라 고운 심성도 그 오빠와 닮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것이 흐뭇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그 남매와 자신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는 점 역시 다시 깨닫고 씁쓸하였다. 쓸데없는 피해의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의 요한은 더욱 그럴 것이다. 아마도 진원에 대한 애정으로 버텨낸 것이겠지. 어쩌면 나는 그만큼 진원을 사랑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시은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당황스러워 애꿎은 차만 들이켰다.


결혼하게 되면…


하랑이 화제를 바꾸었다. 시은은 다시 입을 열어준 시누이가 달가워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결국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게 되면… 아니면 그 전에 오빠가 누구랑 결혼하게 되면, 아니면 내가 크게 아프거나 다치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요…


하랑의 눈시울이 다시금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럼 그때는 말할래요… 모두 다, 오빠한테…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하랑을 보며 시은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앉아 가방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어 손에 쥐어주고 그 어깨를 살짝 안아주었다.


나는 더는 그 사람을 만나기 싫어요. 아니 만나면 안 돼요. 아마도 나는 하랑 씨와는 달리 그저 육체적 본능이겠지만, 그러니까 시간이 흐르면 틀림없이 잦아들 테지만, 어쨌든 최대한 그를 멀리해야 하루라도 빨리 원래의 나로 돌아갈 테니까. 그런데 혹시라도 하랑 씨가 그와 맺어진다면, 그를 자주 보게 될 수밖에 없을 텐데 내가 과연 얼마나 지금까지의 일들을 모두 잊고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할 수 있을지, 당신들 남매한테 떳떳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나는 지금의 내가 너무 버거워 하랑 씨의 괴로움까지 걱정해줄 여력이 없어요. 미안해요.


시은은 차마 하랑에게 말하지 못할 말들을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며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무감하게 다독였다.


******


하랑을 만나고 나서 시은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그녀의 고백을 들은 날부터는 신기하게도 요한과의 꿈을 꾸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으나, 그 꿈에서의 성적 흥분감까지 함께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느낌 때문에 시은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본능과 이성과의 싸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 싸움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평소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집중했지만, 성적인 장면은 물론이고 남녀간 로맨틱한 분위기만 나와도 시은의 머릿속에는 요한과의 실제 있었던 일과 그보다 더 나아갔던 꿈속 장면이 재생되었다. 실제와 꿈속의 감각과 느낌이 덩달아 생생해지며 몸이 짜릿했다. 시은은 그 좋아하는 영상들을 접어두고 고막을 갈기는 거친 사운드의 음악을 찾아듣기 시작했다. 머리통까지 울리는 강렬한 진동 덕분에 잠시동안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평소의 취향을 이겨낼 정도로 그 지속력은 강하지 않았다.


또래의 직장동료 하나는 대형기획사의 데뷔한 지 1년을 갓 넘긴, 특히 뛰어난 외모로 유명짜한 남자 아이돌그룹에 빠져 있었다. 직장에서도 틈만 나면 그들의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듣고, 입만 열면 그들의 이야기를 했다. 방송이나 공연도 어지간히 쫓아다니는 모양이었다. 특히나 예쁘고 멋진 그들의 온갖 영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시름과 걱정이 사라진다는 말에, 시은도 그녀가 신이 나서 추천해준 영상들 중 몇 개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들보다 요한이 훨씬 잘생기고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부작용 때문에 그마저도 금방 그만두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인 요한이 고르고 골라 ‘만드는’, 이십대 초반의 아이돌들보다 잘났을까. 시은은 자신의 안목이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안시은. 그는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더구나 꿈의 상대가 사과든 변명이든 그 어떤 종류의 연락도 취해오지 않는 것이 시은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안달나게 했다. 시은은 메시지나 전화가 올 때마다 요한일까 두려운 마음과 기대되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확인하고, 그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감과 실망감을 같이 느꼈다. 그리고 그 양가감정은 종국에는 분노로 치달았다.


왜 아무 연락도 없어요? 그날 내게 저지른 일 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요? 술김에, 잠결에, 대체 내게 왜 그러냐구요? 시은은 신경질적으로 요한에게 메시지를 입력하다가 취소하는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전화기를 들고 있다 보면 가장 연락이 많이 오는 이는 진원이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요한에게 보내는 광란의 메시지를 입력하던 시은은 진원의 전화가 오는 바람에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대리석 바닥에 정통으로 부딪힌 전화기 액정화면은 산산조각이 났다. 시은은 화면을 거의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박살난 전화기가 진동하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전화기의 진동이 멈추자 시은은 쪼그려앉아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다시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하자 시은은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직장이었기에 곧 울음을 그쳐야 했던 시은은 자리로 돌아가 업무용 컴퓨터에서의 메시지 프로그램을 통해 진원에게 통화하기 힘든 이유를 간단히 타이핑한 후, 근무중이라 많은 이야기는 어렵다고 연락을 마무리지었다. 퇴근하는 길에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전화기 수리점에 들를 수도 있었으나 시은은 반사적으로 집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버렸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저사양의 노트북과 태블릿 중 어디에도 메시지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낸 시은은 자신의 정신상태가 엉망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며 소리를 질렀다.


마침 혼주로서 맞춘 한복을 입어보고 딸에게 보여주려고 오고 있던 시은의 모친 한여사가 놀라서 방문을 열었다.


뭐야,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대답과는 달리 엉망인 딸의 옆얼굴을 보고 한여사는 요새 대체 왜 그래? 왜 그렇게 정신이 없어. 안 되겠다, 당장 밥 먹어. 점심도 제대로 안 먹은 얼굴이네. 밥타령을 시작했다. 아니, 안 먹어. 속이 좀 안 좋아. 그렇게 안 먹고 다니니 속이 안 좋지. 그러다 속 다 버린다.


한여사는 밥상을 차리러 방을 나가려다가 뒤돌아서서는, 설마 너… 아니지? 심각한 얼굴을 했고 시은은 아니야, 엄마는… 약간의 짜증을 내며 그제야 모친에게 시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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