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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D시 역에서

by 지구인 Dec 12. 2024



열차가 D시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시은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핸드백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엄지를 제외한 네 개씩의 손톱들이 양손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뒤늦게 쓰라림이 느껴져 그는 손바닥을 펴고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창가 쪽 옆자리에 앉은 동승객이 몸을 들썩이며 시은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으므로 그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질 급한 승객들이 객실 출입구 앞에 대기하여 문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시은의 시선이 하릴없이 그들에게 닿았다.


한여름의 햇빛은 강렬했고 습도가 높았다. 그럼에도 금요일인 까닭인지 나들이객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역사 안을 비롯해 그 근처에 위치한 지역의 유명 빵집으로 인하여 외지인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고 학구적인 연구도시로만 여겨졌던 D시의 방문객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는 소식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은은 빵을 사고 겸사겸사 관광도 하러 온 사람들처럼 들뜨고 설레는 표정도, 업무관계로 와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직장인들의 낯빛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성객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편안한 얼굴도 아니었다. 시은의 얼굴은 긴장감과 불편함으로 가득했다.


시은은 진원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시어머니의 호출이 아니라 며느릿감이 요청한 만남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서울에서 만나자고 해도 최대한 피하려 했던 자신을 이미 알고 있던 약혼자에게는 그저 결혼 전에 여자끼리 꼭 나눌 말이 있다고 했을 뿐이었다. ‘여자끼리’란 말에 진원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돌아올 때라도 역으로 마중나오겠다는 제안도 그의 여자는 차분히 거절하였다.


요새 시은이 가장 신경을 쓰는 일은 결혼식 준비가 아니라 자신을 최대한 피하는 일임을 진원도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업무가 많아져서 이미 일정이 정해져 있던 양가 친인척이나 지인들에게 드문드문 인사하는 자리 외에는 따로 데이트할 시간을 잡기에는 빠듯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는 물론이고 진원과 단 둘이 있을 때조차 시은은 조신하다못해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시은이 진원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더니 최근에는 없어져버렸다. 그동안 결혼준비로 정신적이나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그렇다 해도 지나친 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여자는 연인의 손길을 피하고 있었다.


어차피 결혼 첫날밤을 위해 자제할 요량이었던 남자가 서운함을 느낄 정도로 여자는 너무도 수동적이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였다. 자기 땀냄새 나, 술냄새 나, 내가 땀 흘려서 싫어, 양치 못해서 찝찝해, 어차피 곧 결혼하잖아, 등등 이유도 다양하였다. 원래도 위생에 까다로운 편이긴 했지만 때로는 그를 넘어서는 열정을 보여줄 때가 드물게 있어 진원을 매혹시켰던 시은이었건만, 요즈음의 그녀는 그야말로 온몸에 철갑을 두른 채 두 눈만 겨우 내보이고 있는 요지부동한 문지기와도 같았다. 그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진원은 시은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있었으므로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자못 섭섭했다. 연인에 비하면 매우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그도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으므로 혼자서 속만 끓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약혼녀가 이른바 ‘결혼 스트레스’에 시달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결혼식만 치르고 나면 해결될 것으로 판단했다. 시은도 곧 결혼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던 것이 그의 판정에 상당한 근거를 제공했다.


결혼하고 나면 한동안은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 그때를 위해 지금은 일에 집중해두자. 그렇게 진원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보다 적확할 것이다.


시은이 진원에게 말한 ‘여자끼리’의 일은 사실 요한의 일이었다.  


진원의 이삿날 술집 앞에서 요한이 입을 맞춰오던 일은 마치 있지도 않았던 일처럼, 어딘가에 실수로 부딪힌 것처럼 시은에게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못했다. 자신은 상대가 진원인 줄로만 알았고 취한 탓인지 그 느낌도 특별하지는 않았고 이내 사라진 데다 바의 사장이 대신하긴 했으나 요한의 사과도 받았으므로, 진원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걸리긴 했지만 그 사건 자체에 시은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픈 요한에게 끌어안기고 눕혀지기까지 했던 일은 시은의 정신이 또렷할 때였고 침대 위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후폭풍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날밤부터 요한과의 야릇한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일에는 그 사건이 그대로 재현되는 꿈이었다. 현실에서처럼 놀라서 깨어난 시은은 당황해하기는 했지만 그럴 만한 충격적인 일이라고 수긍하며 금방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밤에 시은은 또 꿈을 꾸었다. 이번 역시 실제로 그랬듯 요한의 뜨거운 체온과 버석한 입김이 가슴팍에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와 달리 꿈속의 요한은 뜨겁게 입을 맞추어왔다. 꿈속의 시은은 그를 거부하기는커녕 자신의 몸 위에 눕혀진 요한의 마른 몸을 두 팔로 감싸안았다. 물고기의 가시처럼 살에서 발라낸 듯 또렷한 그의 등뼈가 시은의 손끝에서 생생히 느껴졌다. 그를 받아들이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낀 순간 시은은 잠에서 깨었다.


깨어나고 나서도 그녀는 수 초에서 십수 초의 짧은 시간 동안 꿈의 잔향을 강하게 느꼈다. 꿈의 내용과 느낌을 인식하자마자 시은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정욕과 그에 따른 죄책감과 마주하였다. 그 상대가 요한이라는 것과 그 느낌이 진원과의 그 어떤 관계에서보다 자신을 흥분시켰다는 점 때문이었다. 꿈에서조차 실상 그 ‘관계’라는 것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시은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세면대의 수도를 틀어 얼굴에 물을 세차게 끼얹은 후 물을 흐르는 대로 둔 채 거칠게 칫솔질을 시작했다. 아직 동트기 한참 전인 한밤중이었다.


나이가 들어 잠귀가 밝아진 시은의 어머니 한여사가 왜 계속 물소리가 나느냐고 물 아껴쓰라며 화장실 문을 두들겼을 때, 시은은 자신이 평소와 달리 1인가구인 양 조심성 없이 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수도를 잠그고 멍하니 세면대 위의 거울을 바라보다가 뭐하길래 안 나오느냐는 모친의 뒤이은 성화에 겨우 방으로 돌아갔었다. 몽유병도 아니고 애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좋은 일 앞두고… 한여사는 바닥으로 떨궈진 딸의 뒤통수에 대고 혀를 찼다.


그 다음날 밤에도 시은은 같은 꿈을 꾸었고, 자신의 들뜬 신음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뒤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꼈다. 자신의 의식과는 달리, 그보다 더 강할지 모를 잠재의식에서는 약혼자의 절친에게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끌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날 웨딩플래너와의 미팅을 진행할 때 시은은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물건을 떨어뜨리는 등 전에 없던 실수를 연발했다. 그리고 진원의 손이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해 그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죄인의 그것 같은 얼굴을 한 시은에게 플래너는 어머 신부님, 하도 담담해서 강심장인 줄만 알았는데 긴장되긴 하나 봐요~ 코앞에 닥치니까 이제 좀 실감이 나세요? 웃으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예비 신부는 그에 대응할 억지미소조차 짓지 못하였다.


예비 신랑의 걱정에 그의 신붓감은 그저 피곤해서라고만 대답했고, 영양수액이라도 맞자는 제안에도 집에 가서 쉬면 괜찮다고 거절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바쁘고 더구나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고 있으니 당연하지 않으냐, 그러니 결혼식만 끝나면 자연히 괜찮아질 것이라는 시은의 부연설명에 진원은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증세가 더 심해지면 그땐 꼭 병원에 데려갈 거야. 요한이나 자기나 왜 그렇게 병원을 싫어하는지… 내가 정말 아버지 뒤를 이었어야 되나 보다. 부모 말 들어서 나쁠 게 없다더니… 농담을 섞어 푸념했다. 그러자 왜 또 자신과 요한을 엮느냐며 발작하듯 소리치는 신경질적인 반응에 이어, 다 자기 때문이야! 다 자기 잘못이라고! 갑자기 눈물을 쏟는 시은을 그녀의 정혼자는 당황해하면서도 안아 달래주어야만 했다.


3년 가까이 만나오면서 시은이 이토록 흥분하며 울기까지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진원은 스트레스가 정말 심하긴 하나 보다, 그게 나한테까지 전이될 정도니. 내가 좀 더 신경써야겠다. 그 순간에도 그저 반성하고 다짐할 따름이었다.


요한의 이름만 들어도 그의 육신에 대한 욕구와 진원에 대한 죄의식이 동시에 몰려와 괴로운 시은을 진원은 약간의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시은이 단숨에 눈치챈 어린 여동생의 요한에 대한 마음 역시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것과 같이. 시은의 번뇌에는 시누이가 될 하랑까지 얽혀 있는 형국이었다.


진원의 누이는 병문안 이후 따로 시은에게 연락해왔다.


언니, 시간 되시면 저랑 좀 만나주세요… 하랑의 메시지에 그녀의 올케는 요한 때문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고 예상대로였다.


******


하랑도 요한을 짝사랑해왔다. 첫사랑이었다.


요한은 친오빠인 진원보다도 하랑에게 다정하고 친절했었다. 꼬맹이, 그보다 더 많이 우리 공주님이라 부르며 놀아주고, 매일같이 업어주고, 하랑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었다. 특히 어린 하랑이 울 때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언제까지고 업어서 달래주었다.


유아 때의 일이었으니 하랑 자신의 기억은 아니었다.


요한인 나보다도 더 널 챙겼고, 너도 강아지처럼 요한이만 따랐어. 나는 학원이다 과외다 해서 놀아줄 시간도 없었지만.


요한의 목소리가 저음으로 변해갈 즈음, 어린 하랑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요한을 볼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가던 어느 날, 역시 하랑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며칠 동안 크게 앓고 겨우 기운을 찾기 시작한 진원이 해준 이야기였다. 진원이 건강을 되찾은 후에는 다섯 가족이 모처럼 화목하게 지내는 듯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원이 해준 말을 하랑이 몸소 확인하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고, 하랑에게 요한은 ‘다정한 작은오빠’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요한이 다시 밖으로 돌기 시작하고 가출까지 하자 하랑은 울면서 요한을 찾았다. 그러나 모친은 늦둥이 딸아이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무서운 얼굴로 자꾸 그를 찾으면 영원히 못 볼 줄 알라고 야단을 쳤다. 절대 단 둘이 있으면 안 된다고도 경고했다. 그때부터 하랑은 모친이 무서워졌다.


하랑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요한과 진원은 동반입대하였다.


첫 면회 때 졸라서 따라가 만난 요한은 바싹 깎은 머리에 군복을 입은 ‘아저씨’였음에도 규칙적인 생활 덕분이었는지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혈색도 좋아 보였다. 그동안 잠깐잠깐 보았을 뿐인데도 어린 하랑에게도 그늘져 보였던 요한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우리 공주님 그새 많이 컸네. 여전히 하얀 피부의 요한이 미소지으며 말했을 때에 하랑의 채 다 자라지 못한 심장은 그의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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