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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하랑

by 지구인 Dec 16. 2024



벌써부터 하랑은 또래이성들의 고백을 적잖게 받는 처지였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단지 이성에게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라지 않고 하랑은 고루 사랑을 받으며 축복받은 성장기를 보내고 있었다. 지역에서 이름난 내과의의 늦둥이 외딸이 예쁘장한 외모에 공부도 곧잘하는데 성품은 온순하기까지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늘 리더 격이었던 오빠만큼은 아니어도 하랑 역시 자신이 속한 대부분의 사회에서 중심에 자리했던 것이다.


사춘기를 훨씬 지나서도 하랑은 여전히 남자친구가 없었다. 보수적인 부모님의 눈이 무섭기도 했으나 실상 누구에게도 설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요한과 어린 시절을 보내서였을까. 하랑은 도무지 또래남자는 이성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유치하고 어리게만 느껴졌다. 듬직한 맛이 없다.


하랑은 모친 때문에라도 요한과 맺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자기주장 강한 어머니의 뜻에 거의 맞춰주는 편인 데다, 그 역시 요한을 가엾게는 여길지언정 차마 하나뿐인 딸자식을 주려고까지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머리가 굵어진 하랑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요한은 중학교도 겨우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결국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쳤을 뿐이다. 또한 하랑의 부모님은 입에 대지조차 않는 술을 파는, 양친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을 업으로 삼았다. 학벌도 재산도 인맥도 없이,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소심한 하랑은 부모에게 반항할 생각도, 그들의 반대를 이겨낼 용기도 없었다. 더구나 요한은 자신을 그저 어린 동생으로만 여기는 것도 눈치챘다. 하랑은 그에게 마음을 고백할 패기도 없었고 거절당했을 때 그와 어색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멀리서라도, 어린 동생으로서라도 계속 그를 보고 싶었다…


기적처럼 요한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준다고 해도 그 앞날이 무서웠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하랑은 부모님이 요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불륜의 씨앗인 요한의 출생에 대해. 그리고 요한에게 너무 차갑게 구는 어머니를 나무라는 아버지의 말도.


혹시라도 우리 하랑이한테 엉뚱한 마음 가지면 어떡해요? 옛날부터 바람기는 유전이랬어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리고 그 엄마는 또 어떻고요? 당신,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가 후회할 일 만들려고 그래요? 아니면 그앨 뭐 데릴사위라도 삼을 생각이에요?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우리 하랑일… 안 되지.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아버지는 평소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인품 훌륭한 것으로 유명한 아버지마저 저렇게 나온다면… 비빌 언덕이라곤 친오빠뿐이었다.


그러나 진원은 어린 누이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랑이 들키지 않으려 노력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진원은 학업에 바빠 여동생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진원은 자신을 낯설어하는 여동생에게 늘 웃으며 먼저 인사하고 오빠가 바빠서 미안해. 오빠가 더 서운한 거 알아주라. 애정어린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랑은 진원을 스스럼없이 대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 기가 센 모친조차 삼대독자라고 마냥 귀애하기보다는 어려워하는 맏아들인 진원은 누이동생에게도 사이에 여러 오빠가 있고 그 중 가장 큰오빠 같은 느낌이었다. 믿고 기댈 수 있으나 말장난을 건네기는 어려운. 늘 수재소리를 들으면서도 교만한 적 없는 진원의 사람됨을 하랑은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였고, 부모님의 기대보다는 자신의 뜻에 따라 진로와 결혼상대를 결정한 그의 단호함을 동경하였다.


하랑이 대학에 진학하여 상경하자 진원은 그동안 제대로 나누지 못한 남매지정이 뒤늦게 생각났는지, 바쁜 와중에도 여러 번 하랑의 학교 앞까지 와서 밥과 커피를 사주고 용돈도 챙겨주었다. 남자친구 생겼는지도 종종 물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아이고 우리 하랑이도 이제 다 컸네. 어느 놈이 데려가려나. 아까워서 못 보내겠는데. 웃으며 말하곤 했다. 최소한 오빠만큼 잘난 놈 아니면 안 되는데. 신랑감 찾기 힘들겠다, 그치? 어느 자리에서는 농담까지 던졌다.


하랑의 모친은 하랑도 어릴 때부터 다녔던 교회와 서울의 동창회 등을 통해 딸의 결혼상대를 진작부터 물색중이었다. 졸업반이 될 때까지도 애인이 없으면 바로 맞선을 봐야 한다는 지령도 딸에게 내린 상태였다. 연애는 해도 되지만 혼전순결은 지켜야 한다고 으르기도 했다. 그녀가 독실한 교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사위만큼은 꼭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들여야겠다고 되풀이해 말하는 것을 보면.


하랑의 부친은 아내의 극성에 두손두발 다 든 지 오래이고 오빠는 자신이 연애결혼을 해버린 탓이라고 미안하다고 했다. 대신에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진원은 부모님 몰래 덧붙였다. 그 사람이 요한이라도 도와줄까? 하랑은 자신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올케언니가 될 시은을 만났다.


오빠에 비해 무뚝뚝하고 애교도 없어 보였지만 단정한 용모에 조심스러운 태도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똑똑한 오빠가 선택한 여자이니 당연했다. 한 살 위인 연인을 ‘오빠’라 호칭하지 않고 아홉 살 아래인 자신에게는 굳이 ‘아가씨’라 부르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하랑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시은은 제게도 언니가 생겼네요, 라는 하랑의 말에 저도 없던 여동생이 생겨 좋아요, 라고 답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치레도 없었다. 그저 잔잔한 미소로 화답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같은 여자니까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혹시… 도와주지 않을까? 절박한 마음에 하랑은 낙관적인 방향으로만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쳤다. 언니가 도와준다고 하면 원이 오빠도 결국엔 동조해줄 거야. 아무리 봐도 오빠가 훨씬 더 언닐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언니도 받는 것만은 아니고 조용히 오빨 챙겨주는 거 같고.


하랑은 오빠 커플이, 특히 시은이 너무도 부러웠다. 나도 요한 오빠한테 저렇게 사랑받고 싶은데. 아님 내가 원이 오빠처럼 해도 괜찮은데. 오빠가 나를 받아주기만 하면 되는데… 하랑의 상상은 눈물바람 섞인 간절한 기도로 끝나곤 했다. 가끔은 원망 섞인 기도로 돌아서기도 했다. 어쨌든 눈물로써 마무리되는 것은 늘 같았다.


하랑의 기도가 눈물로써 끝나는 이유 중에는 성인이 된 자신에게 대놓고 거리를 두는 요한의 태도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단 둘이서는 따로 만나지 않을 뿐더러, 먼저 연락하는 법도 결코 없었다. 진원까지 셋이서 보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랑이 서운해하면 요한은 담담하게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넌 언제까지나 내 꼬맹이고 공주님이야. 네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정말 행복했으니까…


그 때문인지 요한은 하랑의 생일만큼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선물을 잊지 않았다. 최근 몇 년 간은 메시지 앱에서 하랑이 원하는 선물 리스트에 있는 것 중 값비싼 것으로만 보냈다. 스무 번째 생일 때, 하랑은 선물 대신 영화관람 후에 근사한 데 가서 밥을 사달라고 모처럼 용기를 냈지만 요한은 거절했다. 결국 설레는 마음으로 예매한 영화표는 취소하고 진원까지 셋이서 식사하는 것으로 하랑은 만족해야 했다.


하랑은 끝내 그 영화를 다른 누구와도, 혼자서도 보지 않았다. 그 작품은 만화를 좋아하는 요한의 취향에 맞춰서 고른, 마니아들의 N차관람에 힘입어 상영기간 연장에 연장을 거듭한 애니메이션이었다.


그 후에는 요한이 일하는 바에 기숙사 룸메이트와 함께 가보기도 했다. 클럽에 한 번 가볼 생각조차 없던 하랑으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요한은 그러나 반가워하기는커녕 얼굴이 굳어졌다. 더구나 자유분방한 동행자는 요한에게 치근덕거렸다. 당연히… 여자친구 있으시죠? 그럼요. 여자 없이 못사는 타입이라. 요한은 플러팅을 능숙하게 쳐냈다. 왠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하랑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요한이 뒤따라 나와 택시를 불러주고, 늦둥이 동생이라 마음쓰지 않을 수 없다며 하랑의 룸메이트에게 부탁의 말을 하고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에게는 따로 지폐까지 건넸다. 그러나 눈시울이 붉어진 하랑에게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랑은 그 뒤로는 요한을 찾지 않았다.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한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마자 하랑의 심장이 다시 뜨거워졌다.


더구나 출장가는 날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진원의 말에는 나라도 가야겠다고 충동적으로 결심해버렸다. 하랑은 동아리 선배가 다리를 놓아준, 모친이 알았다면 몇 번 더 만나보라고 했을 법한 조건을 갖춘 남자와의 만남에서 차 한 잔만 마시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떴다. 하랑은 평소에도 실용성보다는 디자인을 중시해온 모친의 뜻을 따르는 편이었지만, 굳이 새로 산 원피스를 차려입은 데에는 소개받은 남자에 대한 예의보다는 요한에 대한 연정이 더 크게 작용했다.


아프다고 해서 걱정돼서 왔다는데 설마 쫓아내지야 않겠지. 차라리 자고 있으면 좋겠다. 깨지 않고 계속 자고 있으면 실컷 볼 수 있을 텐데. 아니아니, 그럼 정말 많이 아픈 거니까 안 되겠지… 하랑은 갈등하며 초인종을 눌렀었다. 좀도둑처럼 굴기 싫어서 벨소리를 울리면서도 괜히 아픈 요한을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면서.


시은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요한을 보니 좋았다. 더욱 마르고 힘없는 모습과 여전히 자신에게 선을 긋는 태도가 마음 아팠지만.


헐레벌떡 도착한 진원은 예상치 못한 여동생의 등장에 놀라고 반가워하며 데이트라도 하다 온 거야? 웃으며 물었다. 하랑은 소개팅이 있어서, 라고 대답하며 요새는 자주 소개팅을 하고, 대학연합동아리에도 가입하고, 스터디도 하면서 열심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오오, 우리 하랑이가 마침내 정략결혼을 벗어나려고 마음먹었나 보네. 잘했다. 진원은 유쾌하게 웃었고 하랑이 살펴본 요한의 얼굴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가 동요하지 않을 것은 예상했던 바였지만 씁쓸했다.


시은이 돌아가겠다고 일어섰을 때 하랑은 진원이 그녀를 배웅하는 짧은 시간이라도 요한과 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요한은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사라진 하랑은 진원이 돌아오자마자 자신도 가겠다고 일어섰고, 태워주겠다는 진원의 제안을 거절하고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날밤 또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  


하랑은 괴롭고 힘들었다.


짧은 생을 살아오며 이토록 무언가를 절실히 바란 적도 없었고, 이토록 패배감과 상실감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힘들었다. 혹시라도 말했다가 어머니가 알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젠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다. 그래서 시은에게 말해버렸다. 혹시라도 날 도와줄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하더라도 속은 좀 시원해지겠지. 설마 내 아픈 비밀을 소문내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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