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시차 09화

홍시

콘크리트 좌표 위를 헤엄친다.

by OUO

홍시


찬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검은 두 다리를 설레는 마음으로 이끌다가도 별이 헤매는 마음으로 나보다 빛나는 너를 찾아서 오르막길로 도망치곤 했다

그 해 겨울은 마치 잘 익지 않은 감처럼 무심코 입에 넣어버리면 텁텁한 목소리만이 나오고 쓴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흔하고 뻔한 마주침이 연속되는 필름 영화 같았다

별안간 너의 눈에 붉게 달아오른 내가 비칠 때 그 눈을 차곡차곡 모아 산을 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위에는 이파리 없는 소나무가 자라고 갈 곳 없는 까치가 둥지를 짓고 있었다

폭설이 내린 탓일까 너는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고 나는 눈 속에 갇혔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네가 써준 편지는 태우지 못했다

손발이 얼고 눈가에 서리가 낄 때쯤 봄이 왔고 여름이 갔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하지만 난 아직도 네가 만들어 준 눈사람처럼 우리의 벤치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날씨의 질투를 피하고 싶었지만 가을은 너무나도 밋밋해 그저 어린 몸으로 사계절을 머금은 너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채기를 했다 병든 몸으로 집을 떠났다 감은 이제 다 말라버려서 더 이상 홍조 같은 주황색을 띠지 않는다 그래 너는 부끄러워하면 꼭 볼이 주황색으로 물들곤 했다

가을이 오면 겨울이 와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눈을 감고 필름을 되감았다 크레디트부터 다시 가을, 여름, 봄, 겨울이 순차적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객석으로 뒷걸음질하고 껍질은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되감기 되던 비명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우린 교실에서부터 시작했었다 이른 가을 어느 날 천장에는 먼지 낀 선풍기가 돌아가고 네이비색 교복 몇 초간의 눈 마주침 떠드는 소리 창가로 비추던 햇빛 그 어디에도 주황색이 없던 그 순간

칠판을 본다 A는 B를 좋아한다 B는 A를 좋아한다 서로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 말장난 같은 장난들이 가루를 내뿜으며 들숨에 섞여 들어간다

빛이 사그라든 이곳은 나만이 남은 극장, 겨울은 끝나버려도 주황색 가을이 온다 감이 익어간다 당신의 눈에 별들이 저문다 달이 그들을 감싼다 우리는 한 점에서 만나려고 콘크리트 좌표 위를 헤엄친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박수를 친다 눈물을 흘린다 장미를 던진다 이내 영화관 문이 열리고 널 닮은 실루엣만이 내 눈 안에 비친다



홍시는 11월에 익어간다. 가을이 익어야 홍시도 익는 것이다. 11월이 되면 서서히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나는 가을의 설렘을 잠시 느꼈지만, 곧 너라는 빛나는 존재가 다가올 것을 알아버렸다. 너는 언제나 높은 곳에 있었고, 나는 너를 향해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언제나 숨기고 싶었던 나를 피해 도망치기 위한 길이었다.


그 해 가을을 떠올리면, 익지 않은 사랑 같은 텁텁하고 쓴 기억들이 생각난다. 마치 삼류 영화처럼 흔하고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마주치고 사랑했던 우리. 하지만 너의 눈에 내가 비칠 때면, 그 모습들을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이 너였는지, 아니면 네 눈에 비친 내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머물던 그곳은 언제나 생명력 없이 갈 곳 없는 자가 머무는 폐허 같은, 겨울 같은 곳이었다.


눈을 쌓고 싶다는 잘못된 해석 때문일까. 슬픔을 머금은 폭설이 내려 나는 눈 속에 갇혔다. 하지만 추위 속에서도 너와의 기억이 담긴 편지는 태우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추위가 가셨고, 너가 내게 준 고통도 녹아내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네가 있던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마치 떨어진 감처럼 그 자리에 머물며 홍시라도 되려는 듯.


그래서 가을은 나를 아프게 했다. 그 계절은 지나치게 밋밋했고, 익지 못한 감들처럼 너의 기억도 남아있었다. 나는 이미 병든 몸처럼 늦어버려, 한때 생기 넘치고 사랑으로 가득했던 주황색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모든 고통이 순환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익지 못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성장의 고통이라고.


그러나 기억을 천천히 되돌리다 보면, 나는 잃어버린 사랑의 시초를 찾게 된다. 주황색으로 빛났던, 마치 설익은 감 같은 시작이 있었다. 우리가 교실에서 아직 푸르렀던 그 순간, 장난처럼 주고받았던 말들, 그리고 그 순간 주황색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그래서 우리의 회상이 끝나도, 겨울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가을 속에서 살게 된다. 사랑이 시작되었던 기억으로 성숙해진 나는 다시 익어간다. 너의 눈 속에 있던 별들은 저물고, 빛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그러나 달처럼 은은한 새로운 빛이 너를 감싸고 있다. 우리는 사랑했고, 기억 속에서 다시 사랑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바닷속을 헤엄친다.


회상이 끝나고, 나에게는 또 다른 영화가 시작된다. 그것이 새로운 사랑일지, 또 다른 고통일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미 너와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감정을 느꼈다. 어떤 것이 다가오든, 그것은 네가 내게 남긴 선물일 것이다.


이미 끝난 너와 나의 사랑은, 홍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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