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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에는별땅에는꽃 Sep 26. 2024

나의 어린 시절

나의 두 번째 이야기 


나는 초등학교를 4개, 중학교를 2개를 다녔다. 

고등학교까지 포함하면 총 7개의 학교를 다닌 샘이다. 


나의 학창 시절의 삶은 제법 불안정했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전학을 4번 다녔으니까. 

감수성 예민한 시기, 어쩌면 학교의 환경과 친구들과의 관계가 

세상의 전부일 어린 시절 그 세계가, 그리고 환경이 수도 없이 바뀌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처음 전학을 이야기했을 때 생각난다. 그때는 처음으로 울고불고 떼를 썼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먹고살기 바쁜 시기 

자녀의 학교를 옮기는 문제는 그렇게 크지 않은 문제일지 모른다고 

지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랬을 테니까.


초등학교 5~6학년 무렵, 한 번은 지역을 옮기기로 했었다.

자영업 종목을 바꾸기 위해서 미리 타 지역으로 집을 옮겼고, 

나와 형 역시 그에 맞춰 미리 전학을 갔다. 

우리의 그때 생활을 말하자면, 부모님의 자영업은 24시간 영업이었고 

오후 3시부터 오전 3시까지 일하는 부모님,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나와 형, 

우리 가족은 생활 패턴이 전혀 맞지 않았다. 


일주일 중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나와 형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케어보다는 학원의 케어를 받게 되었고 

스스로 차려 먹고 치우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다 보니 처음 전학 간 나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틈 속에 끼워진 이방인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늘 그렇듯 이미 형성된 그룹에 들어가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난 그 당시 제법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그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당시 그 도시의 학구열은 매우 높은 축에 속했고 

내가 다닌 학원 또한 지금으로 치면 군대 식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을 방송으로 호명하고, 체벌 방으로 불렀다. 

그 이후 의자 위에 올라 가게 해 커다란 몽둥이를 아이들의 가녀린 발바닥에 수차례 휘둘렀다. 

그때 이후 나는 살면서 발바닥을 맞아 본 기억이 없다.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니 그때의 고통과 수치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맞기가 싫었다. 그리고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보상해 드리고 싶었다. 

사실 놀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공부했다. 그래서일까 성적은 늘 좋았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 고 학년은 등수를 나누는 시험을 쳤었다. 성적은 좋았다.


기쁨은 없었지만.. 그 당시 나의 꿈은 없었고 그런 상담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저 맞기 싫어서, 할 게 없어서 공부를 했다. 대화를 나눌 어른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을 갔으니 형은 그 무렵 중학교 1학년이었다.


형은 사춘기가 찾아왔다. 전학의 단점은 늘 처음으로 들러붙는 친구, 

관심 가져주는 친구는 주로 나쁜 짓을 일삼는 아이들이라는 데에 있다. 

형은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렸다. 학원은 자주 빠졌고 이후에는 완전히 가지 않았다.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형과 나는 어머님 한 배에서 나왔지만 성격 성향이 정 반대의 사람이었다.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공부를 한다거나 책을 읽는 동안 형은 무리에 들어가 놀기를 원했다. 


부모님의 질책은 늘 그런 형을 향해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형도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삶은 늘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때로는 정말 나쁜 결과로 이어진다.


형의 사춘기 스트레스와 부모님의 질책에 대한 분노는 나에게 돌아왔다.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아 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강도가 그리 세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강하게.. 강하게. 처음이 어렵다고 하듯 적응이 되자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어린 나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학원에서도 맞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이제 집이란 장소도 어린 나에게 지옥으로 다가왔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부모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형이 부모님께 혼나면 그 화가 나에게 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집에서 우리를 케어할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버텼다. 

이를 악물고 버티기로 했다. 


우스개 소리지만 그런 환경 덕분에 군대가 편했다. 

그런 어린 시절 덕분에. 조교들의 훈육은 애들 장난 같았고, 

자대에서 선임들의 갈굼은 '이게 다 인가?'라고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도 그 지역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조금은 친구들도 생겼으며, 혼자 있는 시간도 적응하게 되었다. 주로 카레를 많이 먹었다. 

카레를 한 솥 가득 끓여 놓고 가시면 밥에 얹어 데워 먹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 책에 속에 있는 주인공들을, 상황들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형이 보기 싫어 학원이 끝나고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놀이터에 앉아 하늘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다. 그저 학업에 매달렸고, 학업에 열중했다. 

그리고 축구를 많이 찼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유행하던 프로레슬링을 자주 시청했다. 

가끔은 친구들과 시내에 놀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 업종 변경은 계속 미뤄졌으며 (아마 기존에 하던 것이 잘 되었고, 새롭게 생각한 아이템은 리스크가 있었다고 지금에 와서는 생각한다) 시간은 덧 없이 흘러갔다. 

그 사이 형은 가출을 몇 번 했었다. 짧게는 한 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무렵 이 지역을 정리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부록 : 나의 금주 일기)

24-09-26, 금주를 시작한 지 19일 

약을 먹고 최소한 6시간을 자려고 노력한다. 약은 꾸준히 먹는다. 

불안함이나, 초조함, 이따금 찾아오는 과호흡과 식은땀 공황장애는 최근에 확연히 줄어들었다. 

매일 아침 입안 가득 술 냄새가 났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뜨고, 매일 아침 느껴졌던 무기력감과 우울감이 덜하다. 

그렇다고 막 활기가 차 에너지가 넘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에너지는 확보된 느낌이다.
상담을 받고 왔다. 약을 받아온다. 점심은 사발면 하나로 때운다. 


오후가 되니 오늘따라 약기운이 일찍 떨어지는지 답답함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온몸을 적신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한번 시작된 답답함과 불안감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오늘따라 제법 나를 괴롭혀 온다. 


이럴 때면 부정적인 생각들 까지도 저 밑에서부터 슬금슬금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왜 술을 참아야 하는지 본질을 어지럽힌다. 자꾸만 내 이성을 꼬집는다. 우울감이 올라온다. 

우울감이 올라올 때면 얼굴과 귀, 눈들이 가렵다.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귀 안쪽에 뭔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감에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 계단을 이용한다. 바람을 느껴본다. 오늘은 하루종일 이렇게 보내려나.. 오늘 하루가 벌써 걱정이 된다. 


나는 잘 지내야 해, 잘 지내야만 해, 이것 조차 강박일까?. 모르겠다.


어떤 하루가 잘 보낸 하루인지, 나를 위한 하루인지, 그 무엇도 정답을 찾을 수가 없다. 

애초에 정답이 있기나 할까. 정답이 없는 문제에 나는 한 없이 고민하고 몰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오늘도 술을 참아내며, 초조함과 불안감을 이겨내야 한다.. 

밤은 길고 고통은 깊다. 자신과의 싸움은 언제나 외롭다.




(괜히 창밖을 바라본다. 어둑해질 무렵 하늘을 보며 마음을 달래 본다. 캐모마일 차 한잔을 마신다. 제법 여유를 느껴본다. 오늘 하루도 거의 다 지나간다. 별다른 일 없이 흘러간다. 하루를 만족해 본다. 하루하루가 특별할 필요는 없다. 그저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하루가 지남에 감사함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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