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이. 언제 어디서 없어진 거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손가락에 반지가 없다.
순간 시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결혼반지 잃어버리고 남편이 먼저가 아닌 어머니 죄송해요, 였다.
어떻게 마련해 주신 반지인데,
근데 다행히도 어머니가 해주신 건 아니었다... 남편 반지니까. 엄밀히 따지면 친정엄마가 해주신 거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쌓이다 보니 손가락이 굵어져 내 반지가 손에 맞질 않아 남편반지를 끼고 다니다 잃어버렸다.
애들 키울 땐 행여 얼굴에 상처 낼까 싶어 빼놓았던걸 계속 장롱 속에 모셔둔 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상빛을 볼 날도 길지 않을 거란 생각에 신혼 때를 떠올리며 다시는 빼지 않을 거라 다짐했거늘,
1979년 1월 7일, 우린 결혼을 했다.
새마을 운동으로 나라 경제가 좋아지고는 있었지만 그 당시에 더군다나 지방에서 결혼예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고받았던 신랑신부는 드문 시절이었다. 친정엄마가 먼저 제안을 했고 시어머니도 해주셨다.
결혼 후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시어머님이 아가! 너한테 미안한데 이야기를 해야겠다. 하시는데 갑자기 가슴이 덜컹했다. 뭘 잘못했나? 말씀하세요.
손을 꼬옥 잡으시며 사실은 결혼예물로 해준 반지를 형편이 안 됐는데 사위한테 다이아 반지를 해주겠다는 사부인 말에 나도 안 해줄 수 없어해 준 거란다. 아버지 모르게 돈을 빌려서 했는데 내가 갚을 능력이 안되다 보니 힘들구나. 월급 나오면 매달 조금씩 갚아주면 안 되겠니? 하시는데 순간 어머니 얼굴을 봤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시어머니란 위엄도 체면도 다 내려놓으신 참담함이 얼굴 한가득이셨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이번달 월급 나오면 드릴 테니 다 갚아버리세요. 미안하다, 고맙다를 연거푸 하신다.
그 귀하게 나누어 낀 값진 결혼반지를 끝까지 간직하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언제 어디서 없어졌는지 조차 기억을 못 한다는 게 너무도 서글프다.
당신은 6남매를 지방 명문 중고등학교에 한 명도 빠짐없이 보내고, 서울대까지 합격시킨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신 어머니신데 이야기하시기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자존심 상한 일이었을까? 지금도 그 생각하면 죄송 또 죄송스럽다.
살면서 네 명이나 되는 며느리들한테 싫은 소리 한 번도 안 하신 점잖으시고 인자하신 어머니셨다. 항상 너희들이 뭘 알겠니? 천천히 배워 가며 살아라 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잠깐의 치매 증상도 창밖을 내다보시며 옛날 학창 시절에 배우셨다는 일본노래만 흥얼거리셨다. 크게도 아니다.
이 세상 떠나시던 날, 저녁식사 끝내고 주무시다 조용히 가셨다.
결혼해서 시집살이란 걸 모르고 살았으니 얼마나 복 받은 삶이었는가! 주변에서 "시집살이가 지겨워서 시자 들어간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말들을 할 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설마 그렇게 까지 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나도 지금은 다들 싫어하는 시어머니 대열에 들어선 지 19년째다. 과연 나는 우리 어머니만큼 며느리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좋은 시어머니일까? 가끔은 궁금하다. 같은 여자로 며느리로 살아가며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는 사이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결혼초에 며느리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절대 며느리가 딸이 될 수 없고, 시어머니가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서로가 존중하고 서로에게 진실함으로 다가서면 어느 누구보다 더 다정한 고부지간이 될 수 있을 테다. 우리 같이 노력하며 잘 살아보자 했던 게 벌써 19년이다.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 살아왔으니 밝아오는 새해에도 지금처럼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2025년 을사년 뱀띠해에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