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이야기

by 홍주화

한 인간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를 언제라고 봐야 할까? 에릭슨의 심리사회발달 이론에 따르면 인생은 8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는 영아기 (0-1세)로 “세상(양육자)은 믿을 만한가?” 가 발달 과제이다. 2단계 걸음마기 (1-3세)는 “내가 스스로 해봐도 괜찮은가, 아니면 항상 틀리는 존재인가?” 가 과제이다. 3단계는 유아기 (3-6세) 로서, “내가 먼저 나서도 괜찮을까? 아니면 늘 민폐인가?”를 묻는 단계이다. 4단계는 아동기 (6-12세)로 “나는 뭔가를 해낼 수 있는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못났는가?” 가 과제이다. 그리고 5단계, 청소년기 (12-18세)가 바로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단계이다.

난 청소년기에 내 존재의 의미와 근거, 그리고 오늘날 날 형성한 대부분의 것들을 형성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47세가 된 지금까지도 듣는 음악과 보는 영화, 읽는 책들이 다 그 시절의 것들이라는 점을 봐도 그러하다.

늘 내 존재의 본질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질문하며 날카로운 감수성이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찼던 하루하루의 일상에는 공허함이나 외로움보다는 많은 상념들로 인한 부산함, 복잡합이 가득했다. 그 시기 난 외로움이나 지독한 공허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영화에든, 음악에든, 책 속에든, 아직은 모르는 미지의 인생은 의미와 흥미로 가득 차 있었고, 난 처음으로 여러 철학적인 생각들을 하며 충만감을 느꼈다.

겨울 바다의 푸르름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꼈고, 일출을 보며 다짐을 하고, 일몰을 보면서는 막연히 인생의 끝날을 예감하며 더욱 의미를 다지고, 그때까지는 밤하늘에 떠 있던 별들을 보며 우주를 창조하고 관장하는 신의 위대함을 경탄했다. 순수한 정의감과 반항끼로 뉴스를 보면서는 분노하고, 그럼에도 모든 것을 장밋빛 렌즈를 통해 희망적으로 바라보았다.

내 의식 세계는 다채롭고 복합적이어서 무정부 상태 같기도 했다. 희망을 보며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꿈을 꾸면서도 난 지독히 반항적이고 틀을 벗어나는 청소년이었다. 그 무렵 나에게는 “내가 남들과는 다르다.” 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으며 그것으로 내 정체성을 찾았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대중가요를 듣고 춤과 연예인에 열광할 때 난 홀로 미국이나 영국의 록음악 들이나 모차르트, 바흐, 말러, 라흐마니노프 등의 클래식을 들으며 스스로의 수준을 높게 평가했다. 남들이 멜로나 로맨틱코미디의 영화를 볼 때 난 타르고프스키나 키에슬롭스키, 빔벤더스 같은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들을 찾아보고 탐닉했다.

당시 나에게는 다른 모두가 바보 천치 거나 유치하고 허접해 보였다. 그 남과는 다르다는 우월 의식이나 자만심은 도리어 고립감을 야기했으나 난 그것마저도 천재의 특성이나 숙명이라고 여기고 자부심을 승화시켰다.

희한하게도 가끔씩은 날 높게 평가하며 부러워하고 따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나에게 “완벽한 여자, 내 삶의 롤모델.”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런 대우들에 난 더욱더 깊이 중독되어 갔고, 그에 따라 남들과는 점점 더 달라져서 다른 것들을 추구했다.

난 외고의 프랑스어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다른 과의 남자아이들과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맥주를 마셨다. 대부분의 평범한 아이들은 날 “이상하게 사는 애.”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난 나야말로 인생의 참의미와 깊이를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가 성적과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들은 일상에 매몰되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중요한 생각들은 하지도 않는 바보들이었다.

한국 음악은 듣지 않는 나였지만 신해철의 밴드 넥스트의 노래들은 유일하게 좋아했다. 넥스트의 노래 ‘드리머’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난 아직 내게 주어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어. 언젠가 지쳐 쓰러질 것을 알아도 꿈은 또 날아가네, 절망의 껍질을 깨고,”라는 노래 가사는 꼭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루이제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의 여주인공 니나의 도발적이고 독립적이고 관념적인 인생을 동경했으며 나 역시도 그런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릴케와 니체의 연인, 루살로메, 유럽의 마녀라고 불렸던 그녀의 남성편력을 동경했다. 그때부터 난 자칭 ‘최강마녀 순도백프로’였다.

그리고 난 나보다 막사는 것처럼,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에게 부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학교를 빠지고 이성친구와 여행을 가거나 이미 섹스를 경험한 그들의 인생이 좋아 보였다. 그럼에도 지독하게 날 억압하는 초자아는 내면의 리비도와 충돌을 일으켜 심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난 양쪽 발을 한쪽 씩 떠 있는 바다의 두 개의 얼음 덩어리 위에 올린 채로 그 두 얼음의 사이가 점점 멀어져 가랑이가 찢어질 태세였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옮겨 타기에는 현실 감각이 너무 뛰어났다. 난 내가 만약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일탈을 하게 될 경우 망가질지도 모르는 앞날을 걱정했다.

난 내 소원이 “모차르트의 마누라가 되어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건 진심이었다. 광기와 천재의 대명사인 모차르트의 사랑을 받아보는 것, 그리고 그런 천재만이 나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과대망상이 내 비대한 자의식을 더욱 비대하게 키워갔다. 내 눈에 또래의 다른 남자애들은 그저 시시하고 따분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옆 일반고에 다니는 동갑이었다. 날 너무 좋아했던 그는 나와 미래를 함께 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3층집을 지을 거야. 1층에는 홈씨어터와 홈바가 있고, 2층에는 침실과 너의 드레스룸이 있어. 3층에는 옥상을 만들어 커다란 수영장을 놓고, 네가 좋아하는 돌고래를 키울 거야.”

난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는 외모는 그럴듯했으나 공부는 못하는 애였다. 난 그가 그 정도로 많은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와의 데이트 비용을 내는 것도 늘 나였다. 그에게 영화나 음악, 연극을 소개해주고, 가르쳐주고,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도 늘 나였다. 날 다른 차원의 세계, 모르던 곳으로 이끌어주고 안내해 줄 남자를 꿈꾸던 나에게 그는 그저 심심풀이 땅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날 착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더욱 좋아했다. 난 착한 게 맞기도 했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남자가 어떤 메이커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지 따위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사람 하나만 보는 난 어쩌면 착했다. 내 기준은 아예 달랐기 때문이었다. 난 속세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보이기만 했다. 김삿갓과 황진이의 풍류와 방랑, 낭만을 동경하는 나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장그르니에의 <섬>을 읽고 난 충격에 빠짐과 동시에 그의 세계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때마침 류시화 시인이 인도를 찬미하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난 류시화 시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특히 그의 시 중 좋아하는 시는 <여행자를 위한 서시>였다.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 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그때부터 인도는 나의 꿈의 나라였다. 힌두 철학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명상과 깨달음, 해탈의 철학은 그 무렵의 나에게 딱 들어맞는 듯했다. 난 대학에 가자마자 인도로 가서 타르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사파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꿈을 꾸며 지긋지긋한 입시 지옥을 견뎠다. 어쩔 수 없이 나 역시도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었다. 대학간판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지리도 공부는 하기 싫었다. 그랬기에 성적은 점점 더 하락했다. 1학년 때 담임은 서울대를 권유했으나 2학년 때 담임은 이화여대를 권했다. 그리고 3학년 때 담임은 그저 인서울만 가라고 조언했다.

수업 시간마다 내가 하는 일은 세계 지리부도를 펼쳐놓고 가고 싶은 나라들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치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이었다. 난 전 세계를 누비고 싶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는 수업을 듣지 않고 소설책을 읽었다. 그 무렵 나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주는 것은 영화와 음악, 소설뿐이었다.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 내 꿈과 희망은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어서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에 야간자율학습이란 게 있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우스갯말로 “새벽 별을 보며 등교를 해서 밤 별을 보며 하교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특히 외고인 우리 학교는 야자에 엄격했다. 그리고 고 3 때 난 전교에서 야자를 하지 않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난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자의로 야자를 뺐다. 그러면서 혼자 독서실을 다니며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내가 독서실에서 하는 일은 다이어리에 시를 적고,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포스터 엽서를 스크랩하는 일이었다.

그랬어도 난 공부에 대해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 나라에서는 대학 간판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은 심리적으로 더욱 공부를 회피하게 만들었다. 난 급기야 집안, 내 방에서 강아지를 앞에 앉혀놓고 강의를 해대는 선생놀이까지 했다. 한마디로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 살던 집은 빌라였는데 우리 집은 4층이었다. 난 4층의 창문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큰소리로 본조비의 얼웨이즈를 불렀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그리 삭막하지는 않아, 고성을 내지르는 날 신고하는 주민도 없었다. 난 날마다 얼웨이즈를 불러댔다.

처음으로 개기월식을 봤다. 새벽 1시부터 대략 30분 정도였다. 난 그걸 보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버티며 개기월식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마침내 끈질기게 월식을 다 지켜본 후에는 시상이 떠올라, 바로 시를 썼다.

개기월식

그것은 하나의 완전무결한 밝음이었다.

세상에 고루 비치는 선이었다.

그러나 영원할 수 없어 어둠은 밝음을 잠식한다.

어둠은 한 개 반점이 되고

반점은 더욱 번져

마침내는 모든 밝음과 선을 뒤덮고

세상은 암흑의 도가니가 된다.

어둠을 뚫고 나온 빛.

희생의 표시인 피를 흘리면

속죄양의 피로써 악에서 거듭난 영혼이

밝은 옷을 입은 천사의 손에 이끌려

승천한다.

난 오컬트적인 것, 미신적인 것들과 더불어 기독교에도 발을 걸치고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친구와 함께 교회를 다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같은 소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문학 소설이었다. 그때 월식을 보며 이런 시를 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선과 악은 너무나 어렵지만 마력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내가 절대공허의 악을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다. 그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로부터 한참 멀어진 이후였다. 그래서 내 시는 저토록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