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음에 달려 도착한 대저택 앞에서는 고급스러운 창살무늬의 대문이 나를 맞았다. 어두운 회색의 장엄한 문 앞에 서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바로 옆, 이 초인종을 누르면 아주 크고 무서운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먼저 한쪽 귀를 꽉 막고 까치발을 한껏 치켜들어 재빠르게 초인종을 누른 후 다급히 다른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조금 늦게 막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귀를 찔러서 그런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잠시 후 수화기를 받는 달칵 소리가 들렸다.
“민하니?”
“네, 아줌마!”
“조금만 기다려. 은아 내려간다~.”
“네!”
얼마나 지났을까, 타다닥하는 발소리와 함께 회색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살짝 벌어진 문 틈 사이로 나보다 한 뼘 정도 더 커 보이는 새하얀 피부의 소녀가 나타났다.
“민하야, 왔어?”
“응, 누나! ”
백설기 같이 하얀 피부를 가진 은아 누나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연갈색의 긴 생머리와 집에서도 보송보송한 솜털이 달린 하얀 치마 차림을 하고 있는 은아 누나는 오늘도 역시나 정말 아름다웠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빨리 들어와! ”
은아 누나는 내 손을 붙잡고 나를 대문 안으로 이끌었다. 담장 안을 들어서자 마치 성 안의 정원 같은 풍경이 눈 안에 들어왔다. 바닥에 깔린 돌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움직이며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갈하게 이파리가 손질된 정원의 나무들과 곳곳에 장식된 천사 석고상이 정원의 멋을 한층 더해주는 것 같았다.
집 안에 들어서자 부엌에서 은아 누나네 아줌마가 밖으로 나와 반갑게 인사해주셨다. 누가 보아도 은아 누나의 엄마라고 말할 만큼 서로 닮아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면 은아 누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줌마랑 똑같아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민하 왔구나~. 외투 벗어서 아줌마 줘. ”
“네!”
“누나랑 방에 올라가서 놀고 있어. 아줌마가 조금 있다가 간식 가져다줄게. ”
아줌마는 벗은 외투를 받아서 고이 접어들고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말씨로 말을 건넸다. 깃털 같은 아줌마의 손길이 머리를 스치니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나 어제 삼촌한테 인형의 집 선물 받았어. 우리 그거 가지고 놀자! “
“응! ”
들뜬 은아 누나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공주님의 방 같은 반짝반짝한 누나 방이 나타났다. 푹신푹신한 새하얀 침대와 넓은 책상, 곳곳에 있는 여러 가지 인형들을 보고 있다 보면 정말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은아 누나는 나를 앉혀놓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인형의 집을 들고 왔다. 하얀 벽에 분홍색 지붕의 모습을 한 인형의 집은 어디 하나 색 바랜 곳 없이 반짝반짝 윤이 났다.
“이것 봐! 여기 집 안에 찻잔세트랑 강아지도 들어있다!”
은아 누나는 집 안에 들어있던 장난감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요즘 새로 나온 인형의 집이라서 그런지 신기한 장난감들이 정말 많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각자 인형 하나씩을 들고 누나는 집주인, 나는 손님 역할을 맡아 인형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손님인 나는 장난감 강아지와 놀아주고 집주인인 누나는 나를 위해 요리를 해 주었다. 강아지가 신발을 물고 집 밖을 뛰쳐나갈 때마다 우리는 꺄르륵 웃어대며 강아지를 잡으러 뛰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놀았는지, 방문에서 똑똑거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아줌마가 쟁반에 간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쟁반 위에는 유리잔에 담긴 우유 두 잔과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예쁜 쿠키들이 있었다.
“우와!”
“와! 이거 어제 삼촌이 준 거 맞죠, 엄마? ”
“응, 맞아. 민하 맛있게 먹어~.”
“감사합니다, 아줌마! ”
너무 아기자기하고 귀여워서 먹기 아까운 쿠키를 하나 집어 들어 베어무니 와삭하는 바삭한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후 부드럽고 달달한 쿠키 부스러기 하나하나의 질감이 혀에 맴돌았다. 은아 누나네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아줌마가 전에 먹어본 적 없는 귀한 간식을 많이도 내어 주셨지만 지금까지 이 정도로 놀라움에 눈이 크게 뜨이는 느낌을 주는 것은 없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누나! ”
“그렇지? 나도 어제저녁에 엄마가 이 썩는다고 해서 하나밖에 못 먹어 봤는데 지금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
쿠키를 두세 개 집어먹고 나서 유리잔에 가득 채워진 신선한 우유를 꿀떡꿀떡 삼키니 황홀한 느낌까지 들었다. 누나네 집에 놀러 올 때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집에 돌아가야 할 땐 누나와 서로 아쉬워 뜸을 들이곤 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달려 벌써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고 있었다.
“민하야. ”
“응? ”
“오늘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갈래?”
“ 진짜? 그래도 돼? 아저씨 오시는 거 아니야?”
누나에게서 나온 뜻밖의 말에 좋으면서도 의문이 들어 되물었다. 평소에는 은아 누나네 아저씨가 저녁을 드시러 일찍 집에 들어오셔서 다섯시쯤엔 누나네서 나가야 했는데, 오늘은 좋은 쪽으로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응! 오늘 아빠 회사에서 회식하신다구 엄마가 저녁 먹고 가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어. “
“난 좋아! ”
“그래! 그런데 아빠한테 허락 맡아야 되는 거 아니야? “
“아… 아빠? ”
아빠 이야기가 나오니 그냥… 조금 멈찟하게 되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늦게 들어와도 모르는데…
“으음… 아빠는 어제 일하러 나가셔서 오늘 집에 안 계셔. ”
“그래? 그럼 아빠 회사 전화번호는? 전화해 줄게!”
“모르는데… ”
순수하게 되묻는 누나 앞에서 왠지 부끄러워졌다. 나는 단순히 아빠 회사의 전화번호만 모르는 게 아니라 아빠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참 바보 같아서 기분이 안좋아졌다.
“음…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오늘 아빠 늦으실 것 같으니까 밥 먹고 더 놀다가 가. 알겠지? ”
“응…! 알겠어 누나! ”
누나는 연락 문제에 대해서 별 생각 하지 않고 무사히 넘긴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는 누나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가 일 갔다가 돌아오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서 일하는지 전화번호는 뭔지… 꼭 물어봐야겠다.
“얘들아, 밥 먹으러 내려와! “
잠시 후 들려온 아줌마의 목소리에 방을 나서 부엌으로 향하자 내려가는 계단부터 군침이 도는 맛있는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간식을 먹어서 빈 속이 아니었는데도 맛있는 냄새를 맡으니 배가 고파지는 느낌이 났다.
엄청 많은 가짓수의 반찬들이 깔린 식탁에 앉으니 알록달록한 밑반찬들 사이로 큰 그릇에 가득 담긴 고기반찬이 눈에 띄었다. 멀리서부터 풍겨오던 달콤한 냄새가 이 냄새인 것 같았다. 전에는 먹어본 적 없는 고기반찬을 눈앞에 두고 있자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될 텐데… 저걸 입에 넣으면 아무런 생각 하지 못하고 누나랑 아줌마 몫까지 다 먹어버릴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아줌마가 갈비 했어. 여기 있는 것 말고도 더 있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아줌마한테 말해. 알겠지? ”
부엌의 가스레인지 한편에 정말 커 보이는 냄비가 있었다. 아줌마 말로는 저 안 가득히 고기가 차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조금은 많이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잘 먹겠습니다, 아줌마! 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 “
“그래. 많이 먹어~. ”
아줌마의 흐뭇한 미소 속에 신나는 마음을 꾹꾹 참아가며 고기를 가져가 입에 넣자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맛이 입 속에 번졌다. 한 번 씹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고기의 육질과 달콤 짭짤한 양념의 맛이 조화롭게 섞여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만 같은 맛을 이루어 냈다. 음식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는 것일까?
“맛이 어때, 민하야? ”
“진짜 맛있어요, 아줌마!”
“맞아. 진짜 맛있어! 엄마 최고!”
“헤헤헤…”
배도 부르고, 입은 즐겁고. 옆에는 은아누나와 아줌마가 함께 있으니 이토록 즐거운 저녁식사는 너무 오랜만이었다. 우리 집에는 재미있는 장난감도, 맛있는 고기반찬도, 엄마 아빠도 없어서 언제나 이런 저녁시간을 보내는 은아 누나가 항상 부러웠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그 속에 함께 있다. 너무 즐거워!
오늘만큼 행운 가득한 날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