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음… ”
나른한 느낌이 뒷목을 베개로 잡아당기는 상태에서 가물거리는 눈을 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흐, 추워… ”
이불이 걷힌 상반신으로 번져오는 한기를 피해 다시 이불을 덮고 이부자리에 고치를 틀어 누웠다. 추워서 이불을 두 개나 덮고 자 잊고 있었는데 역시나 어제처럼 공기가 찼다. 이러니까 좀 낫네…
‘오늘은 뭐 하지… ’
평소 같았다면 빠르게 나갈 준비를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을 테지만 오늘은 일요일. 어린이 도서관 휴관일이다. 게다가 지금은 은아 누나가 병원에 가기 위해 서울에 있어서 누나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오늘 나는 할 일이 없다.
‘심심한데… ’
이불속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집안을 둘러보아봤자 심심함을 해소해 줄 무언가는 없었다. 귀퉁이가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 제 몸에 꽁꽁 싸매고 있는 이불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무엇도 흘러넘치는 무료함을 충족시켜 줄 순 없었다. 양은 주전자로 어제 은아 누나와 함께 했던 티타임 놀이를 해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괴물 놀이를 해도… 혼자선 재미있을 리가 없으니까.
창 밖으로 보이는 하얀 하늘에 내 얼굴이 비쳤다. 초점 나간 새카만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한참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다 창 속의 아이와 드디어 눈이 맞았다.
나가야겠다. 집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은아 누나가 사는 주택가 중심에는 도서관 옆에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있다. 그곳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있겠지?
얼레벌레 옷을 갖춰 입고 나서 하얀 하늘이 펼쳐진 골목길을 달렸다.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폐부를 거칠게 후벼 파던 예리한 겨울의 낮공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
한겨울의 구멍가게에선 따끈한 호빵 냄새가 풍겨오고 주택가 아줌마들이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무늬 냉장고 바지와 경량조끼를 입은 아줌마, 부엌일을 하다 막 수다를 떨러 나왔는지 앞치마를 그대로 두르고 있는 아줌마들이 평상 위에 한데 모여 동네 속 사랑방을 일구어내고 있었다.
“아이고~ 민하 왔나! “
가까이 다가서자 목소리가 크고 쾌활한 정육점 아줌마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말투랑 억양이 다채로운 정육점 아줌마는 언제나 평상 위에서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다른 아줌마들과 하하 호호 즐겁게 이야기하며 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 가만있어봐라… 오늘 도서관 안 하는데. 은아네 집 가는구나? ”
“아, 아니요! 은아 누나는 오늘 서울에 병원 갔어요! ”
“아 맞나? 그라믄 우얀 일이고? ”
“헤헤 그냥 심심해서… 놀러 나왔어요. ”
“그래~. 우리 민하 심심했구나! 그라믄 잠깐 앉았다 가라. 호빵 사줄게. 언니, 민하 호빵 먹이구로 호빵 하나만 내다 주소~. “
“앗, 괜찮은데..! ”
사실 너무 좋았다. 한겨울 따끈따끈하고 달콤한 팥앙금이 가득 찬 호빵은 맛이 없을 리가 없었을 거니와 아침에 너무 서둘러 집을 나서느라고 아침 식사도 챙겨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번은 거절하는 게 예의라고 책에서 배웠으니까… 아줌마가 그럼 됐다고 안 주시면 어떡하지?
“무슨 소리여! 어른이 주면 사양 말고 먹는 기라. 퍼뜩 앉으라. ”
“헙, 네..! ”
아줌마의 장난기 섞인 불호령에 후다닥 평상에 앉으니 아줌마들은 깔깔 웃고 몸을 들썩거렸다. 조금 기다리자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따끈따끈한 호빵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뜨거움과 따듯함 사이의 중간 온도가 점점 시려오는 손끝을 녹여 주었다. 잠시 호빵을 감상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저 뒤편에서 토다닥 달려오는 귀여운 발소리와 동시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큰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아아아악!!!!! ”
“엇, 현지야! ”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쪼그마한 꼬마 여자아이는 다름 아닌 정육점 아줌마의 딸, 현지였다. 위태 위태하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면서도 두 눈은 내게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나를 향한 집념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빠! 뭐 해? “
“으응… 오빠 놀러 왔어. ”
“그래? 그럼 나랑 놀아라! 가자! ”
“으앗..!! “
현지가 갑작스레 손을 붙잡고 잡아끌어 중심을 잡느라 몸이 휘청거렸다. 넘어질 것 같아서 평상을 꽉 잡고 버티자 현지가 우악 거리며 성을 냈다.
“왜 안 오는데! 빨리 오라고! ”
“최현지! 민하 오빠 귀찮게 굴지 마라! 민하 오빠야는 호빵 먹을 거니까 니는 거기서 얌전히 앉아 있으라! 기지배가 꼴은 그게 뭐고? ”
정육점 아줌마가 치맛바람으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현지에게 소리치자 현지는 금세 눈물을 글썽거리며 소리 질렀다.
“민하 오빠는 여기 잘 안온단말이야! 심심하다고! 그리고 엄마는 왜 내가 사주라고 할 때는 안 사주고 민하 오빠만 호빵 사주는데! 엄마 나빠!! “
“이 가스나가 뭐라노! ”
서러움이 겹겹이 쌓였는지 악쓰며 소리 지르다 콜록거리는 현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사실, 최근엔 은아 누나네 집에 놀러 가느라 현지를 보러 구멍가게에 많이 들리지 못한 것도 맞다. 이렇게 생각하니 왠지 현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안쓰러웠다.
“괜찮아 현지야. 오빠도 오늘 현지랑 놀고 싶어서 온 거야. 오빠랑 여기서 같이 놀까? ”
“응… ”
내 옆자리 평상 바닥을 탁탁 두드리자 현지가 짧은 다리로 열심히 높은 평상을 올라왔다. 현지가 독불장군 같은 면모가 있긴 하지만 영락없이 귀여운 네 살짜리 꼬마아이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자! 이거 너 먹어! ”
손에 들고 있던 호빵을 반으로 가르자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새하얀 김이 펴져 나왔다. 호빵 반쪽을 현지의 작은 손에 들려주었다.
“진짜? 이거 나 주는 거야? ”
“응! ”
“아이고 됐다! 저 가스나 다른 거 다 주워 먹고도 저러는 기다! ”
“괜찮아요! 나눠 먹으면 돼요! “
”오빠가 된다고 하잖아! “
“아이고, 현지도 사주면 되지 거참! ”
구멍가게 아줌마가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다가 답답한 듯 호빵 기계에서 호빵을 하나 더 꺼내 오셨다.
“자! 현지야. 그건 다시 오빠 주고 새거 먹어라. 이건 내가 산다, 현지 엄마! ”
“됐다 성님! 괜찮은데! ”
“현지 엄마가 아니라 현지 사주는 거야. 그리고 현지 엄마도 민하 사주는데 나라고 현지 못 사줄게 뭐야! “
“그래도 참말로… 고마워요! 최현지! 받은 거 다 먹지 말고 빨리 반개 오빠 줘라! ”
현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내게 받은 호빵 반쪽을 그대로 치마폭에 올려두고 구멍가게 아주머니께 받은 새 호빵을 반을 갈라 내게로 건넸다.
“자! 오빠가 나한테 나눠 줬으니까 나도 나눠줄게! “
“자도 참 별나데이… ”
나는 현지에게 호빵 한쪽을 받아 들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우리 둘은 양손에 온도가 다른 호빵을 한쪽씩 들고 히죽거리며 웃었다.
“민하야! ”
구멍가게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고급 승용차의 배기음 사이로 어딘가 익숙한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카만 네모 각진 자동차의 유리 창문 사이로 은아 누나가 몸을 쑥 내밀고는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