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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터 Oct 04. 2024

기행문을 빙자한 반성문

이별이 힘들어서 다 던지고 떠난 미국 여행

다행히 내가 겪었던 이 힘든 시기는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글 쓰는 재주는 없지만, 첫사랑과의 이별 때문에 힘들어했던 나의 이야기를, 브이로그였어야 하지만 게을러서 찍었던 영상을 캡처해 가면서 글로 써 내려가고자 한다. 내 미래의 연인이 보게 되거든 이불을 수천 번 걷어차고 비공개로 내릴 기행문이다. 다만, 변명의 거리를 남겨두자면, 그 사람을 잊지 못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나도 진심으로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에 더 의의를 두어 준다면 좋겠다. (황홀한 여행이었지만, 동시에 구질구질하고 지질했던 내가 쓰는 반성문에 가깝다.)


헤어지고 늘 그래왔듯 일상에 더 몰입하며 지낼 줄만 알았건만, 내 우주가 무너져 버렸다. 이번엔 내 미래를 제법 크게 절삭했는지,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몇 차례의 심리 상담을 받았지만 끝내 그려지지 않는 내 미래와 자기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예정되어 있던 사수의 자리를 탐해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내 결정을 존중해 주신 교수님과 사수의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야, 내가 거기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내 행복은 다 여기 있어." 사수의 말이었다.


실컷 욕을 하고서는, 그리고 아쉬움을 몇백 번 삼키고서야 비로소 나를 조금 가볍게 해주고 싶었는지 하던 말이었다. 무슨 말로 찡얼찡얼거렸는지, 이해해 달라고 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괜찮을 거라고 자만했던 내 모습에 혼이 났다. 다만 그 와중에 떠나고 싶었던 건, 그녀가 보이는 것만 같았던 착각 때문이었다. 이놈의 학교 교정을 걸어 다니는 게 내게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서, 10년 동안 애정하던 학교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다. 어찌 됐건 이렇게 허락받은 시간은 단 100일, 미국에 있는 작은 회사에 파견 근무를 명목으로 다녀오게 되었다.

덜레스 국제공항에 도착
메릴랜드로 가는 길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카카오톡을 통해 홈스테이를 구한 한인 교회의 집사님께서 마중을 나와 주셔서 무사히 메릴랜드로 갈 수 있었다. 기대하던 미국의 첫 하늘과 고속도로를 달리며, 대자연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느낀 감정의 해방은 잊기 힘든 경험이었다. 당분간은 그녀를 떠올리게 할 것들이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안도감이었겠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못했는데, 집사님께서는 "시차 적응은 체력을 빼는 게 최고"라며 세네카 주립공원을 한 바퀴 돌자고 하셨다. (속았다, 잠도 안 오고 힘은 두 배로 들었다.) 공원이라길래 우리나라의 호수공원 정도를 떠올리며 하얀 새 신발을 신고 따라나섰는데, 이 정도면 한국에서는 트레킹이라고 부를 수준이었다. 자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하얀 새 신발은 미국에서의 첫 발걸음부터 때가 타기 시작했다. 저녁 6시를 넘긴 시간이었을 텐데, 이렇게 밝고 아름다울 수 있나?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면 매일 이 공원을 걸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을 텐데... 한두 번 갔나? 이렇게 미국에서의 첫 번째 밤이 끝났다.

잔잔함

2020년, 메릴랜드 옆에 위치한 웨스트버지니아에 교환학생을 지원한 적이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취소되었다. 이것 또한 운명이라 끼워 맞춘다면, 그 커다란 땅덩이 중에서 바로 그 근처에 와 있다는 것, 그리고 비슷한 자연환경을 가진 곳에 있다는 생각에 어쩌면 그때 마주했어야 했던 것들을 찾으러 온 기분이었다. 자연이 아름다웠던 메릴랜드는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쉬울 수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자연을 더 좋아하는 나는 첫 미국 방문지가 세련된 라스베이거스나 뉴욕이 아니었다는 점이 좋았다. 다시 미국에 가게 된다면 메릴랜드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내게 가장 애정이 담긴 곳이 되었음은 확실하다.

첫 출근길

방황의 필수품은 장발이 아닐까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예쁜 사진 한 장도 못 건질 저런 어정쩡한 머리를 하고 간 건 어리석었다. 하지만, 이 또한 내 감정을 잘 나타냈던 나의 모습이라면 이제는 귀엽게 봐줄 수 있다. 첫 출근길에는 비가 왔다. 첫 사회생활이라 회사 사진도 찍어 오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브이로그를 위해 찍었던 영상에서 캡처한 사진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회사 사진은 담지 못했다. 다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교수님의 지인이신 회사의 부사장님, 방글라데시와 프랑스에서 온 직원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29년 동안 대한민국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배운 나의 영어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토끼를 찾아보세요

해만 떠 있으면 위험하지 않다고 해서, 퇴근길이 얼마나 걸리는지 직접 보고 싶어 그 먼 길을 혼자 걷기 시작했다. 남의 집 마당은 왜 찍었을까 하고 돌려 보니 토끼가 있었다. 미국에 처음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토리에 올릴 법한 지나가던 청설모와 토끼를 담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는 어엿한 미국 생활을 한 터라 막 신나서 남의 집 마당에서 동물 사진을 찍으러 넘나 들진 않을 지도.

퇴근길에 차를 타고 다니는 이유라...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흔한 신호등조차 없었고, 서울이었다면 벌써 편의점 다섯 곳은 마주치고도 남았을 거리였을 텐데. 이렇게 나의 첫 출근은 끝났고, 브이로그에 남겼어야 할 뒷 이야기는 감정의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이젠 정말 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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