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놓을 이곳, 메릴랜드
미국에 온 지 고작 3일 차, 나는 집을 잃었다. 원래 잠귀가 밝아 어디서든 잘 못 자는 편이라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하루 이틀 여행이 아니고 꽤 긴 시간 일하러 온 거니까 두 발 뻗고 잘 만한 곳이 필요했는데, 그걸 간과한 거다. 미국 가정집은 보통 지하 1층, 1층, 2층으로 이루어진 3층 집인데, 집사님께서 그중 지하 1층 방을 내주셨다. 가격이 합리적이라 선택했지만,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이 정도면 거저긴 하다.) 막상 들어가 보니 쓰다 남은 가구들로 채워진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지내다 보니, 여긴 아니다 싶었다.
첫 미국 생활이라 적응 잘하고 있는지 늘 물어봐 주시던 박사님께 이 상황을 말씀드려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다들 잘 지내는 공간인데 나만 괜히 유난 떠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쥐가 천장을 긁던 날 결국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박사님이 직접 와서 보시더니, 나와 같은 생각이셨는지, 우선 나와보자며 집을 정하지 못한 채 일단 짐을 싸서 나왔다. 이후 여러 집을 둘러봤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이번 주말까진 박사님 댁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다.
박사님 댁에서 지내면서 제일 좋았던 건 해피... 아니, 사실은 박사님의 유쾌한 성격 덕분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 몇 차례 온라인 미팅을 통해 박사님과 소통했지만, 실제로 뵙기 전까지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교수님께서는 박사님께 나를 보내며 “잘하는 아이라 보냅니다.”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고, 그 칭찬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교수님의 체면도 걸려 있었기에,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더 긴장했다.
그런데 막상 박사님을 뵙고 나니, 그 긴장은 금세 풀렸다. 온라인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유쾌하고 편안한 분이셨다. 내가 예상했던 엄격한 이미지는 사라졌고, 덕분에 조금씩 나도 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었다.
어느 날, 박사님과 드라이브를 하며 마침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내가 미국으로 오게 된 이유는, 잘해서가 아니라 여자친구와의 이별 때문이라고. 솔직히 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고민이 많았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위로해 주고, 건축학개론의 납득이 처럼 욕을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로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 이야기를 털어놓자, 박사님은 다르게 반응하셨다. “그래, 잘 도망쳐왔네.” 처음엔 그 말이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필요했던 건 나의 무거움을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위로라는 게 꼭 무겁고 진지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인생에서 이런 일쯤은 있을 수 있지”라는 무심함 덕분에 박사님과의 대화는 훨씬 편안해졌다. 때론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해 주시고, ‘그게 끝은 아니잖아.’라는 눈빛으로 내 말을 들어주셨고, 비로소 숨통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지나가는 과정이겠거니, 그렇게 조금 더 버텨보기로 되었다.
며칠 뒤, 마침내 에어비앤비에서 괜찮은 집을 구했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박사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박사님은 “뭐, 다 잘될 거야. 이제 시작이잖아.”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 말이 또 한 번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아직 미국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건 아니지만, 이제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사한 집의 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You can't reach what's in front of you until you let go of what's behind you.” 그 문구를 읽고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 내 상황과 꼭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두 다리 뻗고 잘 곳도 생겼고, 박사님의 가벼운 위로를 되새기며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해서도 덜 두려워하기로 했다. 벽에 적힌 그 문구처럼, 나는 비로소 뒤에 있던 짐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