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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한 글자

딱 한 글자. 그런데 오래 남는다

by 언덕파

요즘은 뭐든 짧아야 한다.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즐퇴(즐거운 퇴근)', '취준생', '가성비', '국룰',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 '워라밸', '인싸', '많관부(많은 관심 부탁해요)'...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인다. 메시지도, 영상도, 말도 짧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짧은 말이 더 오래 남는다. 더 깊이 박힌다.



같은 접근은 아니지만 광고 캠페인을 예로 들어보자.

‘쓱’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이마트의 온라인몰 SSG.COM에서 진행한 광고 캠페인. SSG를 있는 그대로 발음한 단어다. 우리말 쓱으로 대체되었고 한 글자의 가치를 선택과 집중으로 캠페인에 쏟아부었다. "쓱 보고, 쓱 담고, 쓱 결제하고." 이 한 글자가 쇼핑의 속도와 감도를 모두 설명했다. 실제로 SSG 브랜드는 쓱이라는 단어 하나로 브랜드를 세웠다. 그 짧은 단어 하나가 모든 걸 말해버린 것이다.



출퇴근을 하기 위해 걷다 보면 매일 마주치는 글자들, 단어들, 간판들이 있다. 친근한 단어도 있고 너무 익숙해서 눈에 띄지도 않는 간판들도 많다. 오늘은 수많은 길거리 브랜드들 중 한 글자로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익숙한 간판들에 대해 얘기해 본다. 골목길의, 시장 길의 간판들의 얘기다. 모두 ‘쓱’ 하고 말을 걸고 있다. 이 간판들은 단어 하나만으로 브랜드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전달한다. 마케팅적으로 보자면, 짧은 단어가 갖는 직관성과 회상 용이성은 브랜딩의 핵심 무기다.



떡 — 추억과 정성의 마케팅

우리 모두는 ‘떡’이라는 간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동네를 가도 어딘가에 분명 있다. 그냥 떡. 한 글자다. 무슨 무슨 떡집이라는 상호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냥 어느 사거리에 떡집이다. 어느 시장 초입의 떡집일 뿐이다. 왠지 오래됐을 것 같고, 정성이 담겼을 것 같고, 포장도 수수할 것 같다. 이 간판을 보면 고급 포장이나 네이밍 없이도, 이미 그 가게의 정서와 감도가 전달된다.

마케팅에서 ‘정성’은 감성 자산이다. 한 글자짜리 브랜드가 정서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소비자는 가격보다 마음을 먼저 연다. 떡은 그래서 고향, 어린 시절, 어머니 손맛 같은 브랜드 스토리를 암묵적으로 품고 있다. 간판 하나에 담긴 무형의 가치가 구매 행동을 이끈다.




한 글자 간판들



약 — 신뢰와 기능의 마케팅

‘약’이라는 한 글자 간판도 비슷하다. 약국이라는 말보다 ‘약’이라는 글자가 더 정겹고, 안심이 된다. 하얀 가운과 둥근 안경, 한편의 생수와 다양한 밴드까지 떠오르게 한다. ‘약’은 기능의 대표 단어다. 하지만 그 기능은 단순히 효능의 문제를 넘어서, ‘믿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로 귀결된다. 신뢰가 핵심 자산이 되는 업종일수록 단어가 단순할수록 좋다. 한 글자 ‘약’은 그래서 브랜딩이 아닌, 브랜딩을 초월한 기호가 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이라는 글자는 상형문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로고이자 단어이기도 하다. 딱, 한 글자로 심플하게 기억시키다니 한글의 위대함으로 느껴진다.




꽃 — 감정과 위로의 마케팅

‘꽃’. 마치 시처럼 서 있는 간판. 이름도, 브랜드도 없다. 그냥 ‘꽃’. 그 자체로 정서다. 누군가는 선물로, 누군가는 위로로, 누군가는 감사로, 누군가는 아무 이유 없이 산다. 그래서 '꽃'은 판매되는 대상이 아니라, 감정 소비의 트리거다. 마케팅적으로 ‘꽃’은 무형 가치의 집합체다. 이 간판 앞에 서면 고객은 가격이 아니라 상황을 떠올린다. 축하, 위로, 기념일, 이별, 고마움, 사랑. 브랜드 없이도 명확한 사용 시나리오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꽃’이라는 한 글자는 구매 타이밍을 내면화시키는 한 글자다.




책 — 권위와 여운의 마케팅

‘책’이라는 간판도 있다. 브랜드명 대신, 한 글자 ‘책’. 작고 오래된 동네 서점 앞에 이 단어 하나만 걸려 있어도 믿음이 간다. 책을 파는 곳이라기보다, 이야기를 쌓아두는 곳처럼 보인다. ‘책’은 콘텐츠의 총칭이지만, 동시에 ‘사유’와 ‘지식’의 기호다. 브랜딩 관점에서 보면, 이 단어는 가르치지 않고 상징하는 브랜드다. 브랜드를 외치지 않아도, 품격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건 가장 고급스러운 브랜딩이다. 한 글자 ‘책’은 소비자의 자아와 취향을 건드리는 심플한 상징이다. 세련된 대형서점 로고가 대형 무대 위에 선 팝스타라면 동네서점 앞에 세워둔 책이라는 간판은 소박한 카페 무대에 선 통기타 가수 같다. 오랜 세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쌓여온 스토리텔링을 만날 것 같은 한 글자다.




빵 — 온기와 리듬의 마케팅

마지막으로 ‘빵’이라는 한 글자. 듣기만 해도 오감이 작동되는 단어다. 요즘 유행하는 감각적인 간판 말고, 살짝 그을린 흰색 플라스틱 간판 위에 검은 글씨로 ‘빵’이라 적힌 곳. 막 구워낸 소보로 냄새가 퍼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빵’은 음식이면서도 리듬이다. 브랜딩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향과 온기를 전달하는 일인데, 이 한 글자 ‘빵’은 그걸 해낸다. 시각보다 촉각, 미각, 후각을 먼저 떠오르게 한다. 고객의 뇌가 감각으로 브랜드를 기억하는 케이스다. '빵'은 그래서 가장 촉각적인 언어다.




한 글자 간판들
한 글자 간판들



요즘엔 브랜드 네이밍보다도 브랜드처럼 작동하는 언어가 더 강력하다. 브랜드 없이 브랜드처럼 보이는 것들. 그것이 말이 가진 힘이다. ‘떡’이라는 말 하나에도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약’이라는 말 하나에도 신뢰가 쌓이며, ‘꽃’이라는 글자 하나에 설렘이 깨어난다. ‘책’은 묵직한 고요함을 남기고, ‘빵’은 따뜻한 냄새를 남긴다. 한 글자의 간판은 설명을 생략하는 대신 감정을 저장한다. 브랜드 없는 브랜드, 간판 없는 마케팅.


말은 짧고, 마음은 길다.

말은 줄어들고, 기억은 깊어진다. 딱 한 글자, 수식어나 형용사 없이도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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