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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는 홈런타자가 아니다

by 언덕파

오랜만에 후배 감독과 점심을 먹었다. 정확히는 후배는 CF감독이다. 같은 대행사에서 PD로 일한 후배였는데 독립해서 프로덕션을 오랫동안 운영해온 친구다. 어쨌든 같은 업계 사람이고 나와는 오랜 호흡을 맞춘 형동생 사이다. 여러 면에서 결을 같이 하는 친구 같은 존재다. 광고업계는 크게 광고주, 대행사, 외주업체로 나뉘는데 외주업체 종류도 다양하다. 나는 외주업체로 분류되는 프로듀싱 컴퍼니를 하고 있다. 광고 기획과 콘셉트, 카피를 포함한 콘티 아이디어와 광고 촬영 후반작업을 두루 슈퍼바이징 하는 일이고, 후배감독은 촬영과 편집, 녹음 등 후반작업 대부분을 디렉팅 하는 프로덕션을 하고 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함께 CF 현장에서 밤을 지새웠고, 술자리에서 광고 뒷담화도 자주 했었다.



갈치구이가 잘 구워진 점심 식탁 위에서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묻는다. 나는 묻는다. “요즘 광고 많이 찍었니?” 후배도 묻는다. “형, 많이 땄어요?” 광고 업계에서 '땄냐'는 질문은 클라이언트 비딩을 뜻한다. 그의 대답은 짧았다. “그냥 그래요.” 요즘, '그냥 그렇다'는 말이 예의 있는 고백이다. 다른 분야도 그럴 것이다. 광고업계 상황도 대체로 비슷하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경쟁은 심해졌고, 기회는 얇아졌다. 그런데도 일은 해야 하고, 쉴 땐 또 잘 쉬어야 한다. 우리는 삶과 일을 반으로 쪼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일을 중심으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요즘 들어 실감한다. 경쟁이 심해지는 시기에 프로패셔널은 어떻게 극복해 나갈까를 생각해본다. 프로는 한 방이 아니다. 홈런 한 방보다는, 3할 타율을 지키는 꾸준함. 그게 프로다. 한때 나는 한 방을 노렸다. 홈런 욕심이 있었고, 단타 따윈 시시했다. 회의에서 센 아이디어만 찾았고, PT에서는 큰 스윙만 꿈꿨다. 그래서인지, 나는 꽤 날카로웠고 조금 예민했다. 팀보다 결과가 중요했고, 정 보다 효율이 앞섰다. 지금은 안다. 그 시절의 날카로움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광고는 철저히 팀워크이고 개인 한 사람이 모든 프로세스를 끌고 가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팀원 모두가 홈런 한방 치겠다고 붕붕 휘둘렀다간 배가 산으로 가고 승률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닥을 치게 된다.


제 아무리 훌륭한 복서라도 링에 오르지 못하면 게임 자체를 할 수 없다. 타석에 들어서지 못하면 스윙을 할 수가 없다.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특히 다양한 스태프들과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은 관계에서도 프로가 되어야 한다. 저 사람하고는 왠지 일하는 게 껄끄러워라든가 일은 잘하는데 너무 독단적이야 라는 평판을 듣는 전문가들도 많다. 나와 후배는 그런 면에서 서로 꽤 유연하게 지내왔다. 견적과 콘티 합의, 광고촬영 중 불쑥 튀어나오는 변수들도 이심전심 매끄럽게 해결해 왔다.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나 전문가네' 하는 모습이 아닌 공생공존의 동업자 의식이 컸던 것 같다. 프로는 모나지 않아야 한다. 둥글고, 유연하며, 관계를 남긴다. 한 방보다, 적당히 잘하는 사람이 결국 오래간다. 그날의 점심은 그렇게 정리되었다. 잘 먹었고, 잘 들었고, 잘 느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후배가 말했다.


"결국, 오래 남는 사람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그 말이 진심처럼 들렸다. 화려하진 않아도 오래가는 평타의 미학. 오늘도 나는, 그 조용한 생존 전략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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