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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사는 것처럼 인생을 살고 싶다

감이 떨어졌다고 느낄 때, 나는 감을 단련한다

by 언덕파

감은 가을에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한동안 권태기가 있었거나 슬럼프를 겪고 나면 감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나는 슬럼프로 인해 운동을 잠시 접거나 특별한 이유로 업무를 떠나 있다가 복귀했을 때 늘 겪곤 했다. 스스로 느끼기도 했었고 주변 지인들의 농담반 진담반 일침으로 깨달았었다. "감이 많이 떨어졌네" "감이 없어서 그래" "이제 감 좀 잡혀?" 등등 감이란 녀석은 잠시만 한눈팔면 금세 떠나가 버린다.



'일에서의 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감이란 무엇인가.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나타나기도 하고, 남의 아이디어를 보며 쓸 만 한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지점에서 작동되기도 한다. 감이 좋을 땐 정확한 잣대 없이도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마치 밥공기의 양을 굳이 저울에 잴 필요 없이 감으로 푸는 것처럼 말이다. 날이 선 감은 불확실하지 않다. 선명하다. 내가 봐도 그렇고 남이 봐도 그렇다. 감이 좋은 사람들은 눈과 귀가 살아있는 듯하다. 특히 광고하는 사람들의 감은 거의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봐야 한다. 회의실에서 의견을 내고 카피를 설득하고 비주얼 아이디어를 꺼내고 맞니 틀리니 하는 모든 과정의 출발은 '감'이라고 생각한다.



감은 단련된다.

마치 감나무의 감이 열려 비와 바람과 햇빛으로 단단해지듯 동료들의 수많은 잔소리와 좌절의 기억, 승리의 짜릿함, 불면의 고민들로 조련된다. 설익은 감은 여지없이 티가 나고 만다. 실수가 나오고 설득되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에 뜸을 생략하고 바로 밥상을 차린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감이 오랜 숙성을 거치진 않는다. 과제를 듣는 순간 단 몇 초만에 우물에서 끌어올리듯 감이 작동하기도 한다. 타고난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런 감이 출현하기 전에 자신만의 단련이 꾸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감은 어떻게 단련하고 유지해야 할까.

하나의 우물을 깊게 그리고 다양하게 파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크게 3가지에 집중해 왔다. 첫 번째는 몸의 단련이다. 체력이 곧 창의력이고, 판단력이고, 리더십이었다. 연차가 올라갈수록 체력의 장점은 감을 날카롭게 유지시켜 준다. 에너지가 없고 매사에 피곤하면 감이 떨어진다. 말하자면 에지가 사라진다. 좋은 컨디션은 좋은 아이디어를 볼 수 있고, 제안할 수 있다. 헬스를 하든 달리기를 하든 등산을 하든 체력을 유지 강화하는 루틴은 필수다. 체력이 떨어지면 감정에 균열이 생긴다. 짜증이 나오거나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팀워크가 중요한 업무에선 의도치 않게 꼰대가 될 수 있다.



내가 감을 단련하고 유지하는 두 번째는 시각적인 자극이다.

업무에서 벗어나 눈을 릴랙스 하는 시간이다. 전시회에게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동네 산책을 한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노려보지 않는다. 그저 눈 가는 대로 담는다고 해야 할까. 일을 위해 긴장했던 눈과 뇌에 주말엔 '쉬어!'라는 휴가를 준다. 유명한 전시나 영화나 여행 같은 멋진 플레이스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업무에서 보이는 비주얼과 전혀 다른 시각적인 자극이 눈과 귀 그리고 뇌를 환기시켜 준다. 깊은 우물이 아닌 얕고 다양한 우물도 파보니 다양한 감들이 믹스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험이 업무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세 번째는 책 읽기다.

잡지 읽고 보는 걸 가장 좋아한다. 트렌드를 파악하기에 좋다. 재테크 책도 읽고 건강 관련 책도 사서 본다. 경계는 없고 술술 읽히면 보고 어려우면 패스한다. 서점에 가더라도 제목이 시선을 끌면 집어 들고 아무 데나 펴서 잘 읽히는 책을 구입한다. 직업과 아무 상관없는 책이 재미있었고 밑줄도 많았었다. 책 읽기는 감이 떨어지지 않게 해야지라는 일종의 든든한 보험처럼 느껴진다. 다 읽고 나면 쭉쭉 그어놓은 밑줄들만 다시 읽어본다. 감은 책장들 사이에 심어지고 밑줄들 사이에서 자라난다.



다음 글은 작년 이맘때쯤엔가 그었던 밑줄이다.



그러나 나는 감을 살 때 불안하지 않다

아무거나 사도,

어디에서 사도 감은 한결같이 달고 맛있다

감은 정말 안전하다

감을 사는 것처럼 인생을 살고 싶다

이것 집었다가 저것을 집었다가,

통통 두들겨보다가,

냄새를 맡아봤다가 하면서 불확실과 씨름하는 일 없이

아무렇게나 선택하고 그게 매번 성공해서

무조건 신났으면 좋겠다



-요조, 만지고 싶은 기분 중에서



아이디어가 건질 게 없네

카피가 약하네

콘티 임팩트가 없네


결국 감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나의 감感도 실패 없는 과일 감처럼

불확실과 씨름하는 일 없이 일에서 매번 성공하는 능력이었으면 좋겠다.







#감 #가을과일 #요조 #만지고 싶은 기분 #내가 그은 밑줄 #아이디어를 춤추게 하라 #탱고크리에이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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