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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이 어디입니까

로고가 사라진 뒤에도 남는 것

by 언덕파

저녁 운동이 없는 간만의 휴식이었다.

집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어색할 정도로, 요즘은 운동이든 일이든 뭔가를 ‘채워 넣는’ 일상이었다. 그러다 무심코 TV를 켰고, 골프 채널에서 은퇴한 여자 프로 선수들의 친선 라운드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냥 화면을 흐르듯 보았는데, 어느 순간 시선을 멈추고 말았다. 그들의 라운드는 대회 중계에서 보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긴장감도, 실전의 날카로움도 사라진 자리엔 느긋한 웃음과 조크, 그리고 다소 엉성한 샷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코어에 대한 부담이나 우승해야 한다는 각오가 필요 없는 명랑 골프였다.


현역 시절, 수천 번의 연습 끝에 만들어진 정교한 템포는 어딘가 둔해졌고, 샷은 종종 휘청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프로도 저럴 수 있구나, 나도 그럴 수 있겠구나."


그렇게 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기분. 하지만 진짜로 내 시선을 잡아끈 건, 그들의 스윙도, 조크도 아니었다. 모자였다. 그리고 사라진 스폰서 로고들. 현역 시절 그들은 항상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모자의 정중앙엔 메인 스폰서 로고가 박혀 있었고, 가슴팍과 팔에는 크고 작은 서브 스폰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건 단지 장식이 아니라, 그들이 짊어진 무게이자 이름이었고, 프로라는 존재의 증명이었다.



지금은 그 로고들이 사라졌다. 모자는 텅 비었고, 유니폼 대신 캐주얼한 복장이 어깨에 걸려 있었다. 한때는 브랜드들이 그들의 몸 위에서 경쟁했지만, 이젠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옷들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은 자유로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쓸쓸했다. 로고는 단순한 상표가 아니었을 것이다. 책임이었고, 긴장감이었고, 존재감을 입증하는 방패이기도 했을 것이다. 광고의 최전선에 선 그들은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스폰서의 로고도 기억되어야 했다. 그것이 프로의 무대고, 때로는 유일한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무대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자유였다. 스폰서의 압박도, 대중의 기대도, 스코어 카드의 냉정한 숫자도 더는 따라붙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면 된다. 타인의 눈이 아닌, 자신의 감각에 맞는 샷을 날릴 수 있다. 자신의 박수를 스스로 보낼 수 있는 골프. 어쩌면, 그것이 가장 온전한 골프인지도 모른다. 그 화면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소속을 벗은 나의 어깨는 어떤 모양일까.”


언젠가, 나 역시 회사를 완전히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더 이상 제안서를 쓰지 않고, 회의실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브리핑용 슬라이드를 다듬지 않아도 되는 날. 내 이름에 어떤 로고도 붙어있지 않을 때, 나는 나로서 얼마나 단단할 수 있을까. 광고라는 세계에서 우리는 늘 어딘가에 ‘붙어 있는 존재’였다. 브랜드 뒤에, 회사 아래에, 조직 안에. 제작자의 이름보다 클라이언트의 이름이 먼저 드러났고, 작업자의 흔적보다 결과가 중요했다. 만약 그 모든 소속에서 벗어났을 때, 내가 가진 관찰력, 감각, 통찰은 사라져 버리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마치 로고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공을 치는 그들처럼 말이다.



그 선수들의 어드레스는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다정했고, 낯설게 조용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샷이 아닌, 자신에게만 들려주는 샷. 비록 무대는 달라졌지만, 스윙은 여전히 아름답듯이.

소속이 사라진 날, 나도 그들처럼 어딘가 쓸쓸하지만 꽤 자유로운 어드레스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를 아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저 사람은 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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