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쯤이었나. 지면광고 촬영을 지금의 대림창고 건물 2층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후배 포토그래퍼에게 맡긴 적이 있다. 클라이언트와 광고담당 기획팀장은 노발대발했다. 왜 잘 나가는 논현동 소재의 스튜디오를 두고 촌스러운 강북 그것도 성수동 창고 같은 건물에서 진행하느냐는 것이었다. 간신히 설득해 성수동에서 무사히 모델촬영을 완료했지만 당시만 해도 성수동은 눈에 띄지 않는 변방 같았다. 그래도 유독 눈에 띈 건 대림창고의 붉은 벽돌이었는데 빈티지한 감성에서 느껴지는 이국적인 멋이 특이했다. 그러나 당시엔 잠시 눈에 띄는 수준의 어탠션에 불과했다. 요즘 성수를 오고 갈 때면 격세지감을 실감한다. 성수동을 걷다 보면 이상할 만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바로 10년 전 눈에 띄었던 대림창고를 비롯한 여러 붉은 벽돌 건물들이다. 이제는 크고 작은 공장, 오래된 창고, 최근 들어선 카페와 브랜드 스토어까지 유리 빌딩이나 아파트처럼 매끈하지 않지만, 벽돌이 주는 질감은 묘하게 사람을 멈추게 만든다. 성수의 거리를 바라보면 하나의 색채가 도시를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서울 안에서도 강남은 유리와 철제의 반짝임, 한남은 주택가의 흰 담과 나무, 종로는 전통 한옥의 기와색이 떠오른다. 그리고 성수는 단연코 붉은 벽돌이다.
성수는 원래 공업지대였다. 70~80년대에 공장과 창고들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가장 효율적이고 튼튼한 건축 재료로 붉은 벽돌이 선택됐다. 값이 저렴하고, 시공이 간단하며, 대량으로 공급되던 자재. 도시를 디자인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경제적 선택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필요의 산물’이 성수의 얼굴이 되었다. 이것이 도시의 아이덴티티가 흥미로운 이유다. 누군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반복된 선택이 쌓여 특정 질감과 색이 도시의 정체성을 만든다. 성수의 붉은 벽돌은 계획된 브랜딩이 아니라, 축적된 흔적이 만든 아이덴티티다.
벽돌 건물은 시간이 흐르며 색이 바래고, 표면이 갈라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낡음’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서 독특한 감도를 느낀다. 성수에서 최근 들어선 카페나 편집숍들이 벽돌 건물에 둥지를 튼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신 브랜드조차 유리 커튼월보다는 벽돌 벽을 배경 삼아 자신을 드러낸다. 낡음을 배경으로 삼을 때, 오히려 브랜드의 개성이 더 살아난다. 도시 브랜딩 관점에서 이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새로운 것을 쌓아 올리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질감을 존중할 때 그 도시만의 무드가 보존되고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사례는 해외에도 많다. 뉴욕 브루클린 덤보(DUMBO) 지역. 과거 항구 창고 지대였던 이곳은 붉은 벽돌 건물들로 가득하다. 낡은 창고에 스타트업과 갤러리,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가 입주하면서 지금은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브루클린 브리지를 배경으로 붉은 벽돌 창고 거리가 찍히면,
그 자체로 뉴욕의 아이덴티티가 된다.
런던 브릭 레인(Brick Lane). 이름 그대로 벽돌의 거리. 과거 노동자 계층의 주거지였지만, 지금은 런던에서 가장 힙한 예술·문화 거리로 재탄생했다. 벽돌 건물 외벽에 그려진 그라피티와 낡은 질감은 런던의 ‘실험적 감각’을 보여주는 시그니처 무드가 되었다. 도쿄 다이칸야마(T-Site 주변). 일본의 다이칸야마 역시 유리 빌딩이 아닌 벽돌과 흰 타일 건물들을 그대로 살렸다. 그 결과 이 지역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여유 있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대형 서점 츠타야(Tsutaya)가 들어서며 도시적 아이콘으로 완성되었다. 이처럼 벽돌은 단순한 건축 재료를 넘어, 도시 브랜딩의 핵심 자산이 된다. 색채와 질감이 곧 도시를 기억하게 만드는 언어가 되는 것이다.
성수의 붉은 벽돌은 단순히 낡은 풍경이 아니다. 이곳에 새로 들어서는 글로벌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들조차 벽돌 건물의 맥락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련되게 입힌다.
이는 성수가 이미 ‘도시 브랜딩의 무드 보드’가 되었다는 의미다. 벽돌 하나하나가 도시의 컬러 팔레트를 구성하고, 그 위에 새로운 브랜드와 문화가 얹히며 ‘성수 스타일’이라는 이미지가 완성된다. 결국 성수의 가치는 건물 내부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붉은 벽돌 질감에 있다. 그 질감이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을 특별한 동네로 기억하게 만든다.
성수의 붉은 벽돌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이유로, 단순한 선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세월이 쌓이며 도시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제 성수를 설명할 때, 우리는 브랜드 이름보다 벽돌의 질감과 색으로 먼저 떠올린다. 도시는 그렇게 기억된다. 결국 도시의 브랜딩은 새 건물이나 화려한 시설이 아니라, 오래된 질감과 색채가 만든다. 성수의 붉은 벽돌은 오늘도 묵묵히 그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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