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지 않아도 오늘은 존재한다
언제부턴가 탁상 달력에 일정을 표시하지 않게 됐다. 예전엔 빨간 펜으로 중요한 날을 동그라미 치기도 했고, 파란 펜으로 미팅이나 약속을 적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책상 위 달력은 그저 '오늘이 한 달 중 어디쯤인지, 올해는 몇 월인지'만 알려주는 존재다. 구체적인 일정은 전부 스마트폰 캘린더에 기록한다.
회의, 약속, 마감일, 심지어 운동 스케줄까지. 이제는 스마트폰이 손바닥 속 개인 비서가 되었으니까. 언제든 이동 중에도 확인할 수 있고, 알람으로 까먹을 일도 없다. 탁상 달력은 기능만 따지자면 철 지난 휴대폰 같은 것이다. 버리기엔 아깝고, 쓰기엔 불편해진 기계.
하지만 기능을 다했다 해서 존재마저 쓸모없어지는 건 아니다. 달력은 여전히 내 책상을 지키고 있다.
매일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거기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의 감각'이 다시 깨어난다. 스마트폰 속 캘린더는 편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눈으로만 보는 기호다. 손으로 만지고 넘기는 촉감은 없다. 달력은 말하자면 ‘날짜의 기계’다. 종이로 만들어진 아날로그 기계. 버튼 대신 나선 고리가 있고, 화면 대신 매끈한 종이 표면이 있다. 그 단순한 물성이 나를 위로한다. 본가에 가면 어머니는 늘 큼지막한 새마을금고 달력을 벽에 걸어놓으셨다. 안경을 벗고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큰 숫자들이 종이 위에 걸려있다. 가족들 생일과 친척 경조사 외엔 적지 않으신다.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어머니만의 스마트 캘린더다.
종이달력 위에 펜으로 눌러쓴 가족들의 생일들이 일 년 치 달력 한 장 한 장에 적혀있다. 나는 요즘 누가 이런 달력을 거실에 걸어두냐고 푸념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달력을 거실에서 당신 방으로 옮겨 걸어두셨다. 여전히 촌스러운 종이달력은 어머니께는 일 년 치 행복인 것이다.
내 탁상 달력은 존재감이 없다. 평소엔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텅 비어 있다. 그저 책상 어딘가에 세워두는 용도다. 세무사가 매년 건네주는 기본 달력이다. 휴일과 음력 날짜, 세무 관련 일정들이 작은 글씨로 찍혀 있을 뿐, 화려한 디자인이나 감성은 전혀 없다. 말 그대로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달력. 그런데 이상하다. 텅 빈 그 칸들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위로가 된다. 스마트폰 속 캘린더는 알림으로 꽉 차 있다. 메시지와 메모, 미팅과 데드라인. 온통 채워져 있어서 숨 쉴 틈이 없다. 반대로, 책상 위 달력의 빈칸은 나에게 말을 건다.
“아무 일 없는 날도 괜찮아.”
사실 매일매일이 다사다난하다. 작은 일로 흔들리고, 뜻하지 않은 상황에 끌려가기도 한다. 그럴 때 빈칸은 마치 숨구멍 같다. 쓸쓸해 보이지만, 그 여백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한다.
스마트폰 화면을 스와이프 하는 건 빠르다. 그러나 그것은 감각이 아니라 기능이다. 달력은 다르다.
넘기고, 만지고, 손가락 끝으로 종이의 질감을 느끼는 순간,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날들이 된다. 달력은 여전히 나에게 ‘날짜를 만지는 경험’을 준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종이를 직접 보고, 만지는 순간 오늘 하루가 더 실제처럼 느껴진다. 마치 살고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는 의식 같다. 텅 빈 달력을 가끔 앞뒤로 넘겨본다. 아무 일정도 적혀있지 않은데 지난날들의 기억이 떠오르고 다가올 일들을 기대하곤 한다. 스마트폰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순간이다. 빈칸은 상상을 만든다.
매년 연말이 되면 종이 달력을 여러 개 받았었다. 하지만 이제 세무사 달력 외엔 받을 수가 없다. 이제
인쇄된 시간을 선물하지 않는다. 봉투에 들어있는 달력을 받을 땐 별것 아닌 듯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멋도 없고, 감성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하다. 하지만 매년 같은 자리를 지키며 내 책상을, 내 방 어딘가를 채우곤 했다. 그 자체로 파트너였다. 내가 일하고 휴식하는 시간을 묵묵히 함께 보내는 동료와 친구. 말도 하지 않고, 알림도 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늘 내 옆에서 존재감만으로 시간을 증명해 준다. 달력은 기능보다 감각을 남겨준다. 빈칸은 공허가 아니라 여백이다. 손으로 만지는 종이는 불편이 아니라 실재다. 그리고 매년 바뀌지만 늘 똑같은 달력은 변화 없는 일상의 한 지점을 지켜주는 의식 같다.
어쩌다 보니, 내 책상 위 달력은 늘 텅 비어 있다. 언제부턴가 일부러 안 적고 있다. 하지만 그 공백 덕분에 나는 달력을 다시 보게 된다. 빈칸이 있기에 오늘 하루가 다시 눈에 들어오고, 그 빈칸 덕분에 나는 잠깐이라도 요즘을 확인한다. 달력은 그래서 기록이 아니라, 내가 오늘을 붙잡아두는 조용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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