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입었다는 건, 오래 아꼈다는 뜻이다
8월의 서울. 햇살은 가을로 넘어가려는 듯하지만, 아직은 뜨거운 바람이 지배하는 계절이다. 지난 주말, 옷장을 정리하다가 블랙 니트 하나를 꺼냈다. 여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겨울 옷. 하지만 그 니트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내 손에 자주 걸리는 옷이다. 늘 같은 자리에 걸려 있으면서도 자주 손이 간다는 건
그만큼 그 옷이 내게 주는 감정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니트는 몇 해 전, 내 생일 즈음에 선물로 받은 옷이다. 어깨선도, 목둘레도, 기장도 신기하게 딱 내 몸에 맞았다. 고맙다는 말은 짧았지만, 속으로는 ‘이거 자주 입겠다’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 겨울 내내 그 옷을 자주 입었다. 회의 자리에서도, 광고 촬영장에서도, 가끔은 아무 약속 없이 나간 카페에서도. 이젠 어떤 자리에서도 내가 편하게 입는 옷이 되어 있다.
문득 보면 팔꿈치 쪽엔 보풀이 제법 올라와 있다. 손목 라인도 거칠고, 밑단엔 실밥이 슬쩍 올라와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자국들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많이 입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보풀은 옷의 결을 따라 생긴 생활의 흔적이다. 닳은 자리엔 내가 자주 만졌던 손의 습관이 남고, 마모된 곳엔 익숙한 움직임이 저장되어 있다. 그러니 보풀은 애정이 만든 낡음이다. 나는 가끔 보풀 제거기를 꺼내 그 옷을 조심스럽게 손질한다. 하나하나 밀어내고 나면 조금 전까지 낡아 보였던 옷이 다시 단정해진다. 비록 새 옷 같지는 않지만, 다시 꺼내 입고 싶은 상태가 된다. 그건 어쩌면, 관계에서도 필요한 정리일지 모른다.
조금 낡았다고 버릴 게 아니라 정리하고 다듬으면 다시 함께할 수 있는 것. 그게 어떤 물건이든, 어떤 기억이든.
그 옷을 꺼낼 때면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몇 년 전 함께 백화점에서 걷던 날, 거기서 이 옷을 슬쩍 봤고, 며칠 후 종이백에 담겨 내게 건네졌던 기억. 지금은 함께 걷지 않지만, 그 시절의 공기와 분위기 그리고 “이거,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았어”라는 말은 아직 옷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는 매년 찬바람이 불면 그 옷을 꺼낸다. 마치 찬바람 불 때마다 등장하는 핫초코 광고처럼. 그건 단지 보온이 목적이 아니라 어쩌면 어떤 계절의 감정선을 다시 꺼내 입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낡았다’는 말을 나쁜 뜻으로 쓴다. 낡음과 닳음. 오래돼서 쓸모없고, 이제는 바꿔야 할 것. 하지만 이 니트를 보며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낡고 닳은 건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함께한 시간이 많다는 뜻이고, 쉽게 버릴 수 없는 무게가 생겼다는 뜻이다. 보풀은 시간의 부스러기다. 그걸 손질하고 다시 입는다는 건 그 시간마저 아끼는 사람의 태도일 것이다.
요즘처럼 무언가 조금만 상해도 바로 교체하고 바꾸는 시대에 이 니트는 나에게 ‘남겨두는 것의 가치’를 알려준다. 그건 단순히 오래 입었다는 말이 아니라, 오래 아꼈다는 말이다. 이제 곧 여름이 끝나갈 것이다. 계절이 지나 첫추위가 오는 날이면 나는 또 그 옷을 꺼낼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 니트를 입고 거리를 걸을 것이다. 마치 그 옷과 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때쯤이면 팔꿈치엔 또 조금의 보풀이 올라와 있을 것이다. 지난겨울 동안 내가 움직이고, 기대고, 무심코 손으로 만졌던 자리들. 어쩌면 그건
내가 보낸 계절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보풀은 그렇게 생긴다. 사랑받은 것에만 생긴다. 닳은 자리, 오래 머문 곳, 애정이 지나간 흔적. 그러니 나는 그 보풀을 밀어내는 대신 조금은 남겨두기도 한다. 너무 지우지 않고, 그 시간의 질감을 조금은 간직한 채로. 그게 옷이든, 기억이든, 사람이든 조금쯤은 남겨두는 것이 좋다. 우리는 그 남겨진 것에서 때로 온기를, 때로 나를, 그리고 어떤 계절을 다시 꺼내 입게 되니까.
#오늘의뒤테일 #정카피 #비사이드웍스 #보풀난니트 #애정의흔적 #생활속통찰 #브랜드감성 #낡음의미학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