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칸의 간격 – 에스컬레이터 위의 심리학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면 무심하게 한 칸을 비우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무심하게’라는 표현은 어쩌면 틀렸다. 사실은 아주 ‘자연스럽게’다. 대략 60cm 남짓한 그 공간은, 한국에서만큼은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간격이다. 그 짧은 거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빈칸이 아니다. 그것은 안전거리이자 예의범절이며, 또 한편으론 묘한 심리적 완충지대다. 뒤에 선 사람의 호흡이 목덜미에 닿지 않게 하고, 앞사람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질이지 않게 해 주는—작은 평화조약 같은 것.
가끔 나는 이 간격을 시험해 본다. 한 발짝, 아니 반 발짝 정도만 더 앞으로 다가서 본다. 반응은 거의 즉각적이다. 앞사람의 어깨가 살짝 올라가거나, 허리를 조금 더 곧게 펴거나, 시선을 휴대폰 화면에 못 박는다. 사람은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에 본능적으로 민감하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타인이 50cm 이내로 들어오면 대부분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불쾌감과 경계심을 느낀다고 한다. 에스컬레이터의 한 칸은 그 경계선 바깥쪽에 자리 잡은 절묘한 거리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 칸’일까. 두 칸은 너무 멀다. 붙어 서면 불편하다. 한 칸은 그 중간지점이다. 앞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지만, 체온은 느껴지지 않는다. 소리 없이 서로를 인지할 수 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거리. 흥미롭게도, 해외에서는 이 규칙이 잘 통하지 않는다. 도쿄의 러시아워는 한 칸을 비우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밀집된 공간에서는 물리적 간격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다. 런던의 에스컬레이터에선 ‘오른쪽은 서고, 왼쪽은 걸어간다’는 규칙이 더 강력하다. 뉴욕은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 뒤에 서 있다가 조금만 빈틈이 생기면 바로 옆으로 스치며 내려간다. 이 차이를 보고 있으면, 한 칸의 간격은 물리적인 치수라기보다 문화적 코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붙어 있진 않지만, 멀어지지도 않는다’는 한국식 거리 감각이 만든 풍경.
재미있는 건, 이 거리는 낯선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연인도, 부부도, 동료도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종종 한 칸을 유지한다. 나란히 서는 건 어색하고, 붙어서 서는 건 괜히 민망하다. 심지어 오래된 부부도 한 칸 간격을 두고 앞뒤로 선 채 묵묵히 올라간다. 서로의 등을 바라보는 그 장면은 묘하게 편안하고, 또 묘하게 단호하다. 이 간격을 보고 있으면 다른 풍경들도 떠오른다. 식당에서 마주 앉았을 때의 테이블 너머 거리, 회의실에서 옆자리 의자 간격, 골프장에서 앞 팀이 티샷을 마치고 카트를 출발하기 전까지 기다리는 시간.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 규칙을 지키며 살아간다.
광고 일을 오래 하면서 나는 또 하나의 ‘거리’ 원칙을 배웠다. 소비자와 브랜드 사이에도 ‘한 칸의 간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너무 가까이 붙으면 ‘팔려고 덤비는’ 느낌이 난다. 너무 멀면 존재조차 잊힌다. 적당히 보이되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 바로 그 한 칸만큼의 심리적 여백이 메시지를 더 잘 스며들게 한다.
물론 이 간격이 깨지는 순간도 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성큼 다가올 때, 혹은 앞사람이 두 칸을 비우고 서 있을 때다. 전자의 경우 숨이 목 뒤에 닿는 것 같은 압박이 느껴지고, 후자의 경우 내 앞길이 이상하게 넓어져서 당황스럽다. 그 순간, 평범하던 에스컬레이터가 낯설고 기묘한 공간으로 변한다. 에스컬레이터는 늘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 위의 사람들은 각자 다른 속도로 생각한다. 어떤 이는 휴대폰 속에 빠져 있고, 어떤 이는 멍하니 다음 계단을 바라본다. 나 역시 그 한 칸에서 생각을 굴린다. ‘이 거리가 조금만 더 가까워진다면?’, 혹은 ‘조금만 더 멀어진다면?’ 하고.
결국, 한 칸의 간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그 거리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달라진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건 쉽지만, 편안하게 유지하는 건 어렵다.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배우는 건, 그 ‘편안한 유지’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관계에 은근히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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