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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Nov 14. 2024

오로라를 찾아서

4. 시작부터 삐거덕! 노르웨이 베르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을 출발, 오로라를 향해 떠난 첫 목적지는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이다.


자그마한 베르겐 공항의 수하물 컨베이어는 같은 가방만 빙글빙글 돌리며 새로운 가방을 뱉어낼 줄 모른다.

30분쯤 기다렸나?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컨베이어만 바라볼 뿐이다.


결국 통째로 한 컨테이너 분의 짐이 오지 않았다. 공항 직원은 안내방송은커녕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다.

쫓아가 물어보니 그제야 수하물 분실 신고서를 작성하라며 늘어서 있는 줄을 가리킨다.

이런 일쯤이야  있는 일이라는 듯,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금발의 북유럽 아가씨가 무표정한 얼굴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분실 신고서의 빈칸을 채운다.


우리는 오늘 밤 베르겐 항구에서 배를 타고 오로라를 찾아 북극권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2주 동안 미리 짜인 일정대로 오로라 크루즈를 떠나야 하는데 가방이 다른 도시로 날아가 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한 마음으로 하소연하는 우리를 신고서 접수 직원이 가볍게 풀어준다.


“오로라 찾아가는 후티루튼 크루즈지? 걱정 마, 배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다 아니까 가방이 오면 배까지 가져다줄게.”

크루즈 출항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접수 직원은 가방이 오는 대로 오늘 밤 출항 전까지, 만약 가방이 늦게 도착하면 내일 배가 기항하는 올레순 항에 직접 배달시켜 주겠다며 아주 편안하게 염려 말라는 말투다. 그렇다면 좀 안심이 되네.


이 없어 한결 가뿐한 몸으로 공항버스에 올라 시내로 들어갔다.


버스에서 바라다보는 베르겐은 아름다웠다. 대기에 물안개가 자욱하고 낮 2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해가 지며 어두워지는 느낌이지만 언덕에 붙어있는 집들은 따스하고 정겹기만 했다.


우리가 승선하는 트롤피오르호는 후티루튼(Hutigruten) 크루즈에서 운영하는 연안 여객선이다. 들쭉날쭉 뻗어있는 노르웨이의 긴 피오르 해안선을 따라 베르겐으로부터 러시아 국경에 맞닿은 항구인 시르케네스(Kirkenes)까지 왕복하면서 겨울철이면 오로라 크루즈로 운영한다.

우리는 6박 7일 동안 시르케네스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올 예정이다.


연안 여객선이므로 일반적인 크루즈라면 필수적이라 할 다양한 오락시설도 갖춰지지 않았고, 저녁마다 열리는 파티도 없다.

여름에는 백야의 길고 긴 낮 시간 동안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노르웨이 피오르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겠지만, 낮이 점점 짧아지다가 결국 사라져 버리는 겨울철에는 오로라를 보는 일 말고는 관광객들이 배에 승선할 이유가 전혀 없는 코스이다.


배에 올라 체크인을 하고 한밤중 출항할 때까지 남는 시간에 다시 시내 구경에 나섰다.

베르겐은 중세 발트해 연안의 상업도시들이 연합해서 만든 한자 동맹 중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최대 항구이자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베르겐은 원래 노르웨이의 수도였다.


베르겐의 옛 부두인 브뤼겐(Bryggen)은 13세기부터 상인들이 세운 중세풍의 다채로운 목재 건물들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지역이다.


브뤼겐 역사지구에 있는 목조 건물들은 대부분 1702년 대화재 이후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비슷한 톤의 집들이 나란히 서있는 거리를 걷다 보면 한겨울인데도 추위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좀처럼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따뜻한 날씨가 결국은 2주 내내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되지만 한겨울의 베르겐은 그저 예쁘기만 했다.


공항 직원의 말만 듣고 너무나 마음을 놓은 나머지 분실물 신고 확인서도 챙기지 않은 채 산책을 하고 돌아와 보니 이런!  오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공항 항공사 담당자는 말이 계속 바뀐다.

일부 화물은 이미 공항에 도착했으나 우리 가방을 포함한 나머지 화물은 지금 어디로 가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어쨌든 오는 대로 출항 전까지 배로 가방을 보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나 결국 아무 짐도 오지 않은 채 예정된 밤 10시 반이 되자 배는 속절없이 베르겐 항을 떠나버렸다.


요즘 항공사는 부치는 짐 무게에 엄격한 제한을 둘 뿐만 아니라 화물도 1인당 하나씩으로 제한하기 일쑤여서 추운 지방으로 갈 때조차 어쩔 수 없이 위탁수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결국 북극권 여행을 위해 준비한 커다란 설상용 부츠는 짐에 넣기를 포기하고 직접 신은 채 비행기에 올라야 했었다.


몇 걸음 걸어도 스며드는 후끈함과 열기를 참으며 배에 오르자마자 가벼운 신발로 갈아 신으려 했는데 바꿔 신을 신발이 없다.

설상용 부츠를 신고 배 안을 뚜벅뚜벅 돌아다니려니 발은 무겁고, 한참 걷다 보면 마치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느낌이다.


우리가 기내용으로 들고 온 가방에는 묵직한 카메라와 렌즈 등 촬영 장비, 노트북과 각종 배터리뿐이다.

모든 충전기는 비행기로 보낸 짐 속에 있다. 충전을 못 하면 카메라와 노트북은 무용지물이다.

신발뿐만 아니라 갈아입을 옷도 없다.


잃어버린 짐이 출항 전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까진 배 한쪽 구석에서 와이파이가 가능하다는 걸 알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카카오톡을 해대며 신났었다.

그러나 배는 출항을 해버렸고, 우리의 짐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충전이 불가능한  문명의 이기는 하나씩 그 능력을 상실해 갔다.


새벽 잠결에 스마트폰이 마지막 신음을 흘린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스마트폰도, 카메라도, 노트북도 가느다란 충전 줄 하나로 생명을 이어간다. 그 끈이 떨어지고 나면 힘없는 쇠붙이, 처치 곤란한 쓰레기일 뿐.


무슨 일이 터지든 틀림없이 돌아갈 것만 같은 세계 최고의 선진국 시스템도 정작 일이 터지면 인도 시골 마을과 큰 차이 없이 어설프기만 하다.

배터리가 스러져가는 전화기를 움켜쥐고 다시 공항에 연락을 취해보지만 짐의 행방을 아직도 찾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


오로라는 지구라는 거대한 자석에서 펼쳐지는 전자기의 춤이다. 힘을 잃은 전자제품들을 바라보며 오로라를 향해 떠나는 앞으로의 여정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밀려온다.


‘북극권에만 오면 나를 볼 줄 알아?’

어디선가 오로라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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