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로라 크루즈 (1)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을 출발, 오로라를 찾아 떠난 첫 목적지는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Bergen)이다. 자그마한 베르겐 공항의 수하물 컨베이어는 같은 가방만 빙글빙글 돌리며 새로운 짐을 뱉어낼 줄 모른다.
30분쯤 기다렸을까?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컨베이어 벨트만 바라볼 뿐이다. 결국 한 컨테이너 분량의 짐이 통째로 오지 않았다. 공항 직원은 안내방송은커녕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다. 쫓아가 물어보니 그제야 수하물 분실 신고서를 작성하라며 길게 늘어선 줄을 가리킨다. 이런 사건쯤이야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젊은 여성이 무표정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신고서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오늘 밤 우리는 베르겐 항구에서 배를 타고 2주 동안의 오로라 크루즈를 떠나야 한다. 만약 가방이 다른 도시로 날아갔다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으로 하소연하는 우리에게 직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오로라 찾아가는 후티루튼 크루즈지? 걱정 마요. 그 배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다 아니까 가방이 오면 배에까지 가져다줄게.”
가방이 도착하기만 하면 출항 전까지, 혹은 내일 기항지인 올레순 항으로 직접 배달해 주겠다며 염려 말라는 말투다.
짐이 없어 오히려 가뿐한 몸으로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베르겐은 물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오후 두 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해가 기울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언덕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따스하고 정겨워 보였다.
우리가 탈 트롤피오르호는 후티루튼(Hurtigruten) 크루즈 회사의 연안 여객선으로, 베르겐에서 러시아 국경의 시르케네스(Kirkenes)까지 왕복한다.
여름엔 백야 속 피오르 절경을 즐길 수 있지만, 겨울엔 주로 오로라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들만이 배에 오른다.
체크인을 마치고 시내를 걸었다. 베르겐은 한때 노르웨이의 수도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다. 옛 부두에는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바다를 따라 늘어서 있었고, 한겨울인데도 공기는 그리 차갑지 않았다. 그 따뜻한 날씨가 훗날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되리라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공항 직원의 말만 믿고 안심한 나머지 분실물 신고 확인서도 챙기지 않은 채 배로 돌아왔으나, 짐은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자 항공사 담당자는 “일부 짐은 도착했지만 당신의 가방은 아직 찾지 못했다”면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밤 10시 반, 아무 짐도 받지 못한 채 배는 속절없이 베르겐 항을 떠났다.
요즘 항공사에서는 위탁 수하물을 1인당 한 개로 제한한다. 우리는 북극권 여행을 위해 준비한 커다란 설상용 부츠를 가방에 넣을 수 없어 아예 신고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몇 걸음만 걸어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무겁고 두툼한 신발을 빨리 갈아 신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다. 설상용 부츠를 신고 배 안을 뚜벅뚜벅 돌아다니려니 발은 무겁고, 마치 펭귄처럼 뒤뚱거리게 된다. 신발뿐 아니라 갈아입을 옷도 없다.
핸드캐리 가방에는 카메라와 노트북, 배터리뿐. 충전기는 모두 사라진 수하물 속에 있었다. 충전을 못 하면 모든 장비는 무용지물이다. 짐이 올 거라 믿었던 출항 때까지는 와이파이가 가능한 구석에서 친구들과 카카오톡을 하며 웃을 수 있었다. 배는 떠나고 이내 모든 문명의 장비들이 하나둘 힘을 잃어갔다. 새벽녘 스마트폰이 마지막 신음을 내며 꺼졌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기기들도 결국 가느다란 충전 케이블 하나에 생명을 의지한다. 그 끈이 끊어지면 힘없는 쇠붙이에 불과하다. 배터리가 꺼져가는 전화기를 움켜쥐고 공항에 연락을 취해 보지만, 여전히 짐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대답뿐이다.
오로라는 지구라는 거대한 자석에서 펼쳐지는 전자기의 춤이다. 힘을 잃어가는 전자제품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여정이 녹록지 않겠다는 예감이 밀려왔다.
‘북극권에만 오면 나를 볼 줄 알아?’
어디선가 오로라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오로라는 남북극이 아니라 위도 60도에서 75도 사이, 이른바 ’오로라 오벌(Aurora Oval)‘에서 주로 나타난다. 오로라 오벌은 도넛 형상의 띠를 두르며 자극점을 둘러싸고 있는데 노르웨이 쪽에서는 북극권 바로 위쪽이 오로라 오벌에 속한다.
북위 66도 위쪽, 해가 지지 않는 백야와 해가 뜨지 않는 극야가 교차하는 곳, 북극권.
나는 예전에 알래스카에서 백야를 본 적이 있다. 새벽녘에야 해가 졌다가 서너 시간 후면 다시 환해졌다. 북극권의 극야는 생각과 달랐다. 밤은 물론 깜깜했지만 낮은 특별했다. 칠흑 같은 어둠만 계속될 거라 생각한 나에게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아스라한 여명은 아름다움 그 이상이었다.
베르겐을 떠난 다음 날 아침 9시, 어둠이 조금씩 걷히며 눈 덮인 산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10시 무렵 붉은 여명이 구름을 물들이고, 태양은 낮은 각도로 남쪽 하늘을 스치듯 이동했다. 북극의 햇살은 낮 동안 내리꽂는 햇빛 없이 은은하게 세상을 덮었다.
배는 올레순(Alesund)과 트론하임(Trondheim)을 지나 나흘째 되는 날 새벽, 마침내 북극권에 들어섰다. 다행히 올레순에서 잃었던 짐을 찾으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북위 66도를 통과하는 순간, 선상에서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얼음 세례를 받는 작은 의식이 열렸다. 모두 웃으며 소원을 빌었다.
북극권에서 첫 기항지는 보되(Bodø) 항이다. 사방에 얼음이 꽁꽁 얼어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항구의 밤공기는 포근했다. 마치 봄바다처럼 살랑살랑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왔다.
북극권에서도 고기잡이와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는 따스한 바닷물을 타고 연어, 대구, 청어 같은 물고기들이 북극해 가까이까지 거슬러 올라온다. 그러나 이 따스한 난류는 오로라 관찰에는 천적이다. 오로라는 맑은 하늘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극권에 들어온 지 이틀째, 구름이 짙어졌다. 정오가 가까워져도 하늘은 잿빛 그대로다. 설산은 하얗게 빛나고 마을은 눈으로 덮여 있다. 구름은 엄청난 무게를 지닌 듯 아래로 내려앉아 수면에 닿을 듯하다. 잠시 하늘이 밝아지길래 서둘러 갑판 위로 나왔지만, 곧 짙은 안개가 몰려든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오로라는 없다.
베르겐을 떠난 지 닷새 만에 후티루튼 크루즈는 트롬소 항구에 도착했다. 러시아 지역을 제외하면 북극권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유럽 오로라의 수도’로 불리는 곳. 그러나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의 폭설이 쏟아졌다. 눈보라는 그칠 줄 몰랐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가장 큰 기대를 품고 찾아온 트롬소. ‘북극권의 파리’이자 ‘북극 탐험의 수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세찬 눈보라는 내 마음까지 얼어붙게 했다.
눈보라가 잦아든 뒤에도 트롬소의 하늘은 잿빛 구름에 가려 있었다. 북대서양 난류로 인해 존재 가능한 북극권의 도시들, 그러나 바로 그 따뜻한 해류 때문에 겨울 내내 흐린 날이 이어진다. 오로라를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그것은 끊이지 않는 좌절과 갈망을 안겨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