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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의 첫 오로라 - 오로라는 별과 함께 온다

노르웨이 오로라 크루즈 (3)

by Bora

제대로 된 오로라를 만나보지 못한 채 출발지 베르겐으로 회항하던 후티루튼 크루즈는 호닝스보그(Honningsvåg) 항구에 들어섰다. 다른 항구와 다름없이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기다리던 오로라는 여전히 멀기만 했다.


하선한 승객 대부분은 관광버스에 올라 노드캅(Nordkapp)으로 향했다. 유럽 대륙 최북단이라 불리는 그곳은 호닝스보그에서 북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한 렌터카 회사를 찾아갔다.

“이런 눈길에서 운전할 수 있을까요?”라는 내 질문에 직원은 시원스레 “물론이죠.” 라고 답했지만, 나는 살짝 겁이 났다. 이 지역 차량들은 모두 스파이크 타이어를 장착하고 있다지만 한 번 미끄러지면 그야말로 고립이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응급 전화번호 113과 국가번호 +47을 메모해 두었다.

정오 무렵, 희미한 햇빛이 남아 사방을 분간할 수 있을 때 차를 몰고 노드캅으로 향했다. 두터운 설상화를 신고 수동 기어를 조작하느라 시동이 몇 번이나 꺼졌다. 도로변의 소박한 집 몇 채를 지나자 금세 무인지경의 설원이 펼쳐졌다. 눈 덮인 언덕 사이로 잿빛 바다가 스쳐갔다. 북극해로 연결된 바렌츠 해다. 새하얀 지에 새하얀 눈 길이 뻗어있다. 앞에서 달려가는 자동차의 미등만 사라지면 완벽한 화이트아웃의 세상이다. 끝없이 꼬불거리는 산길에서 핸들을 잡은 손엔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땀이 배어난다. 시로 눈이 쏟아져 내렸다.

마지막 몇 킬로를 남겨두고 도로가 차단됐다. 쌓인 눈 때문이라 했다. 잠시 후 트랙터가 선두에서 눈을 치우면서 차량들이 천천히 뒤를 따랐다. 그 사이 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오로라를 볼 확률은 제로. 노드캅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노드캅 절벽 위에는 유럽의 북쪽 끝을 상징하는 지구 조형물 하나가 조명을 받으며 서 있다.


안내소에는 그곳에서 찍은 사진엽서가 전시돼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건, 지구 조형물 위에 초록과 보라색으로 빛나는 오로라 사진이었다. 날만 맑으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나중에 구글맵에서 확인한 사실. 노드캅은 유럽 대륙의 북쪽 끝이 아니었다. 대륙과 해저터널로 연결되어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곳이 유럽 대륙 최북단이라며 지구 모형 아래에서 만세를 부른다. 어차피 북쪽 끝이란 것도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개념일 뿐, 섬이면 어떻고 육지면 또 어떤가.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상황은 점점 비관적으로 변하고 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맞아야 한다. 오로라가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야 하고 태양풍이 도착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하늘이 맑아야 한다. 그중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건 날씨다. 이번 여행에서는 내내 구름이 걷히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며칠 전 우리가 지나온 트롬소 남쪽에서는 맑은 날씨 덕분에 오로라가 연일 관측되고 있다고 한다. 태양풍은 충분히 불고 있으니 구름 위에서는 오로라가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볼 수 없을 뿐.

’오로라가 우리를 피하는 걸까?‘ 날이 갈수록 오로라를 보고 싶은 갈망은 커져만 갔다. 역경이 계속될수록 열매는 더욱 달다고 했던가. 초반에 쉽게 오로라를 만났다면 그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선 먼저 하늘이 열려야 한다. 하늘이 열리지 않으면, 별빛이 쏟아지지 않으면 오로라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로라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쫓아가면 이미 오로라는 아스라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곤 했다. 마지막 날 밤 나는 배의 갑판에서 오로라를 기다리기로 했다. 밤 11시, 옷을 든든히 입고 9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또 눈보라가 흩날린다.


‘눈 온다고 실망 말고, 날이 맑다고 기대하지 말라.’ 노르웨이에서 배운 격언을 떠올리며 나는 애써 희망찬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눈이 그치고 잠시 후, 갑판 위로 하나 둘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별이다!”

일단 별을 봐야 오로라를 볼 수 있다. 희망이 솟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로라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나에게 오로라는 별빛과 함께 나타났다. 오로라는 별에서 내려오는 듯했다. 커튼처럼 드리워지다가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조지훈의 시 <승무>처럼 실크보다 얇은 고운 빛깔의 천들이 나부꼈다. 그 빛은 사진에서처럼 강렬한 녹색은 아니었으나 연하게, 그래서 더욱 부드러운 빛으로 흩날렸다. 하나둘 북극성 아래에서 시작해 소용돌이치듯 나타났다가 또 다른 쪽으로 옮겨가며 오로라는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점점 짙어지면서 점점 넓게 퍼져나갔다.


곧이어 북쪽 하늘 전체가 오로라로 뒤덮였다. 너울거리는 모습은 은하수가 쏟아지듯, 아니 온 하늘에 은하수 지도가 펼쳐지는 듯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오로라의 현란하고 아련한 춤은 계속 됐다.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게, 그러다가 구름에 밀린 듯 조금씩 희미해졌다.

구름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오로라를 보며 다시 한번 화려한 춤의 향연을 기대해 본다. 북극성 아래 앉아 오로라를 기다린다. 구름과 함께 쉬고 있는 오로라는 희미한 연기구름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름과 오로라는 다르다. 구름은 별빛을 가리지만 오로라는 별과 함께 있다. 별과 함께 쉬고 있다. 쉬고 있는 오로라는 평화롭고 안온해 보였다.


내가 만난 오로라는 레벨 7에 달하는 꽤 강렬한 오로라였다. 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오로라에 빠져 잊고 있던 추위가 다시 몰려들었다. 북풍은 거셌고 손발이 점점 얼어붙어왔다. 강렬하게 터졌던 오로라가 마치 꿈결이었던 양 벌써 아련해졌다. 갑작스럽게 나타났다가는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려서 내가 보았다는 것조차도 꿈만 같았다. 카메라를 통해 내가 본 오로라의 실체를 확인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똑같은 오로라였으나 카메라 속의 오로라는 마치 슬로모션으로 필름을 돌린 듯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눈으로 다시 보고 싶었다.

두 시간을 기다렸다. 새벽 두 시, 마지막으로 오로라는 한 번, 넓은 커튼을 드리우며 북쪽 하늘 전체를 휘감았다가 곧 다시 사라지고는 잿빛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마침내 오로라를 만난 곳은 오로라 오벌 아래 북위 64도, 뢰르빅에서 트론하임으로 향하는 바다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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