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가대표였다.
그렇게 미국 유학에 선발된 후, 나는 텍사스 달라스 공항에 첫 발을 디뎠다. 최종 목적지는 텍사스 샌안토니오.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나의 인생도 새로운 활주로 위에 서 있었다. 달라스까지 12시간이 소요되나 더 늦게 도착한 관계로 연결 편을 바로 탈 수 없었다. 그래서 공항을 조금더 살펴볼 수 있었다.
달라스 포트워스 공항에는 한국에 있는 TGI Fridays가 눈에 띄었다. 미국은 경제강국이면서도 군사강국답게 공항에서도 군에 대한 예우의 분위기를 감추지 않았다. 군인이 비행기를 타면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
그리고 박수가 이어졌다. 그게 미국에 처음 도착한 나의 첫 느낌이었다.
나는 텍사스 샌안토니오의 공군기지 내에 위치한 국방언어학교(DLI, Defense Language Institute)에서 영어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배우는 영어교육은 회화뿐 아니라, 연합작전을 위한 군사용어, 실용영어, 발표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약 9주간의 교육을 받고 통과해야 미군들과 함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과 우방국인 세계 각국의 장교들이 있었다. 콜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태국, 대만, 바레인, 아프가니스탄, 남아공, 쿠웨이트, 일본, UAE, 이집트 등 다양한 국가들이었다.
나는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다른 나라 장교들은 모두 놀러 온 느낌이었다. 수업시간에 늦거나 지각을 했다. 수업시간에는 다리를 꼬고 창밖을 보기도 했다. 결국, 영어 강사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나에게 많은 질문과 발표를 시켰다. 태도가 좋은 나에게 부득이하게 발표 기회가 많이 주어졌고, 모든 것은 나의 몫이 되었다. 다른 나라 학생들도 어느새 계속 나를 쳐다보기 일쑤였다. 그때 깨달았다. 태도가 기회를 만든다는 것을.
한 번은 강사가 느닷없이 브리핑을 시켰다. 또 브리핑 희망자가 있는지 어김없이 물었다. 그러더니 "캡틴 오!"를 불렀다. "Purple Heart(미 훈장)"에 대해 브리핑을 해보라고 했다. 지명되었는데 빠질 수도 없어서 최대한 아는 지식을 동원하여 설명했다.
퍼플 하트는 미 훈장인데 공적이 있는 사람 중 전시에 적으로 인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장으로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수여된다.
내 설명이 끝난 후 강사가 덧붙인 말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전투 유공을 세운 사람이 은퇴 후 민간 복장에도 훈장을 달고 다닐 수 있습니다. 훈장이 있으면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를 공경하고 장군까지 훈장을 단 사람에게 경례를 하지요. 하지만, 부상을 당해 살아남은 사람은 운이 좋은 것이고 대부분 죽게 되어 받으니 안타깝지요."
2012년 당시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전 세계 도처에 있는 테러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지킨다는 명분 하에 분쟁지역을 비롯한 테러 의심국가로 여겨지는 국가에 병력을 파병하고 있었다. 파병 중에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자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하는 군인들에게 국민들은 늘 존경의 마음을 다했다.
우리나라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아직도 국제법상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다. 우리의 국력이 약했던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모택동의 힘을 빌어 속전속결하면 이길 수 있을 거란 판단 하에 전쟁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북한의 여러 도발이 있었고 우리 역시 이름 모를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우리의 경제성장과 한미동맹이라는 억제 수단으로 인해 현재까지 북한은 한반도를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잠정 중단한 상태이다.
퍼플 하트를 발표하면서 다시금 나라를 지킨다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외교와 군사력이 국가를 보위할 수 있도록 하는 인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또 기억에 남는 일은 자원봉사 활동을 한 것이다. DLI 교직원 멜리사를 따라서 Food Bank의 일종인 비영리 단체에 가게 되었다. 나를 비롯해 16명이 지원을 했다. Food Bank는 후원받은 음식을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눠주는 곳이다.
우리는 주방과 문짝 등 시설물들을 청소하기도 했고 나눠줄 음식도 준비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배식도 해줬다. 내가 맡은 일은 식판에 옥수수 알갱이를 퍼주는 일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나는 태도를 바르게 했다. 적극성과 밝은 웃음을 보여줬다. 그랬더니 그들은 나에게 엄청 고맙다면서 온갖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God bless you."
아마도 그때 그들의 말 덕분에 내가 신의 은총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장 흥미로웠던 기억은 우스꽝스러운 망사를 머리에 쓴 일이었다. 음식을 다루는 만큼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도록 망사를 씌운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스타일이 너무나 망가졌다. 스타일은 망가졌으나 마음만큼은 보람된 하루였다.
그때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살기로 다시금 다짐했다.
그렇게 수업과 방과 후 활동, 타국 학생들과 교류를 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쓰기, 말하기 등 종합평가가 끝나고 결국 졸업식이 다가왔다.
평생 국내파일 줄 알았던 나. 20대에 수능을 망치고 갈 길을 몰라 방황했던 나. 외무고시를 보려고 했던 나는 어느덧 국제 감각과 연합작전을 할 수 있는 소통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이 반드시 정답이 아닙니다. 한걸음 내딛고 보면 새로운 길 위에 서있습니다.
그 새로운 길은 어쩌면 내 운명을 결정하는 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어떤 길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갖춘다면 혼자 가는 길이더라도 결코 두렵지 않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