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이라는 새로운 세계
수능 실패 이후 군대에 간 나는 외무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외무고시 합격을 위해, 학창시절 군인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내가 군대를 택한 이유는 첫째, 국방과 외교는 교집합이 많고 둘째, 군대에서 생도생활을 하면서 국제관계학과를 택한다면 충분히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내 계획대로 3사관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생도가 되어 그때부터 외무고시를 준비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3차 시험까지 있었는데 마지막 3차는 면접이었고 1~2차는 전공지식과 제2외국어가 필요했다. 대학에서는 공대로 입학했지만, 생도가 되어서는 국제관계학과를 택했다. 고등학교 때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했지만 주변국인 일본어를 택해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임관 3년 차인 2007년, 무료로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모집공고가 났고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어 지원했다. 내가 지원한 과정은 미국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이었다. 1차 서류전형에서 1명 뽑는데 80명이 지원했다고 들었다. 2차는 면접이었는데 나를 포함해서 10명이 면접장에서 만났다. 그렇게 10대 1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육사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면접관은 중령, 대령 계급의 육사 교수님들이었다. 당연히 나는 그들을 알지 못했다. 이유는 내가 육사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0명 중 9명은 육사 출신이라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었다. 순간 아무리 영어성적이 뛰어나도 확률은 10분의 1 이하가 되겠다는 직감을 했다. 더구나, 육사 출신 9명 중 5명은 선배였고 4명은 동기였다. 그중 1명은 아버지가 육사 교수인데 유학 시절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친구였다. 또 다른 동기는 상급부대의 좋은 보직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전속부관(장군의 비서)였다. 선발될 확률은 더욱 줄어들었다. 첫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로 막을 내렸다. 훗날 들은 이야기이지만 3년 선배가 선발되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4년간 나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통역을 하다가 전속부관이 되었고 그 후 강원도 고성에서 150명을 지휘하는 중대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정이 생겼다. 아내는 결혼 후 나를 따라와서 시골에서 우울증을 겪어야 했다. 남편은 새벽 5시쯤 출근을 하는데 밤 12시가 다 되어 집에 왔기 때문에 녹물이 나오는 30년 된 아파트에서 혼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공동묘지 앞에 자리 잡은 낡은 아파트에 혼자 있는 게 늘 무섭다고 했다.
어느덧 나는 '외무고시'보다 다른 것에 더욱 열정을 쏟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중대장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편으로서의 역할 사이에서의 고민과 어려움이 많았다.
중대장을 마칠 때쯤 다시금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해 '비전노트'를 적어가며 생각하게 되었다.
'군대라는 조직을 발전시키기 위해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고민 끝에 이번에는 미국 군사교육을 지원했다. 4년 전 선택받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에 비해 보다 성숙했고 나 역시 당시 선배들만큼의 경력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많은 지원자들 사이에서 내가 미국 군사교육에 선발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비육사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해외 군사교육에 선발된 것이었다.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경쟁도 치열했고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나를 택해 미국에 보낸 이유를 나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생각했다.
첫째, 세계 군사대국 1위이며 일명 '천조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미군들에게 한국군을 대표해서 친선을 맺고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둘째, 미국에 교육 오는 다른 우방국들의 장교와도 관계를 맺고 한국군의 우수함을 알려야 한다.
셋째, 미국에서 배운 군사적 지식을 한국에 와서 적용하고 우리 고유의 것으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2011. 9. 28.
너무 설레는 순간이다. 나의 꿈이 또 하나 이루어졌다. 미국 고등군사반에 선발되었다. 누가 보면 한순간 운이 좋아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2007년 선발에 떨어져서 슬퍼하던 이가 이제는 유망해졌다. 지나고 나면 이렇게 되려고 실패했었나 보다. 만약 중위 시절에 대학원에 갔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기만성이랄까?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겸손으로 둘러싸인 실력이 나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더 열심히 하자.
2012. 5. 15.
미국 샌안토니오에 온 지 보름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새롭다. 이제 영어도 잘 들리고 미국인들이 말할 때 캐치해서 노트에 적고 따라 할 수도 있다.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으면서도 애국심으로 뭉칠 줄 아는 미국, 비록 지금 우리나라는 선거 시즌이고 내수부진과 사회적 이슈들로 복잡하고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미래 모습을 보는 것 같고 이곳에서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
2012. 6. 6.
지금 미국은 6월 5일. 한국은 6월 6일 현충일이다. 타지에 있으니 한국이 더 생각난다. 미국에 온 지 약 한 달이 조금 넘었지만 강대국이라는 이 나라를 보면서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된다.
미국은 군인이라 하면 존경의 대상이요, 영웅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한 사람이 충분히 대우받는 나라이다. 참전했던 노인들은 군복을 입고 다니거나 모자를 써서 자신이 Veteran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미국은 어디를 가도 Military Discount가 되는 나라이다. 이런 인식들이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을 오늘날까지 오게 한 것이라 생각한다.
민족이 달라도 애국심은 하나이다. 국가란 존재는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얼굴이다. 물론, 국내에서는 성장논리에 대해 말도 많지만 외국에 와서 삼성과 LG TV, 휴대폰이 쫙 깔려있는 것 보면, 또 현대와 기아차가 도로를 활보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보고 자랑스러우면 바로 그것이 한국인이다.
나는 요즘 아랍, 콜롬비아, 인도네시아 Military Students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있다. "안녕! 이름이 뭐예요? 이모! 밥 주세요. 진짜 맛있어요. 잘 먹었습니다." 등 한국을 널리 알리고 우리의 걸그룹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문화의 힘이라 생각한다.
몇 년 전 중국의 CCTV에서 방영했던 '강대국의 조건'에서 폴 케네디, 고인이 되신 헌팅턴 교수 등 많은 분들이 강대국의 조건은 문화의 힘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나는 내일도 태극기가 붙은 전투복을 입고 세계의 무대로 뛰어들 것이다.
4년 전의 실패가 없었다면 이러한 작은 성취도 없었을 것이다. 2007년 면접장에서 느꼈던 좌절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중대장으로서 150명을 이끌고, 전속부관으로서 장군의 곁에서 배우고, 통역으로 국제 감각을 키운 4년의 시간이 결국 나를 비육사 출신 최초로 미국 군사유학에 선발되게 했다.
불리한 조건은 포기의 이유가 아니라 더 철저히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출신이 아닌 실력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다른 길을 찾았다. 사회로 치면 SKY처럼 육사 출신들이 가진 인적 네트워크 대신 나에게는 현장에서 쌓은 경험, 실력, 절실함, 비전이 있었다.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는 반드시 온다. 다만, 그 기회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모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기회를 받아들일 만큼 자신을 준비시켜 놓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점점 연합작전 전문가의 문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