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누가 규정하는가?
벌써 25년 전의 일이다.
학생이었던 나는 2000년 수능시험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한 나라다. 그만큼 학벌 중심의 사회이기도 하다. 어딜 가든 학벌이란 간판이 좋으면 좋은 인식이란 출발선부터 달라질 수 있다. 나 역시 학창 시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긴 했다. 나 역시 피할 수 없이 인생의 첫 관문인 수능시험을 보게 되었다.
결과는 평소 모의고사보다 약 5~10점 정도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물수능'이었다고 한다. 만점자가 40명 정도?
그렇게 쉽지는 않았었는데?
몇몇 친구들은 평소보다 20~30점까지 점수가 상승했다. 알고 보니 내가 망한 것이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반에서 1등을 몇 번 했었지만,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의 결과가 그렇게 쓴맛이었다.
사실 나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나라가 IMF 금융위기를 겪고 난 이후인 1999년 경, 대우자동차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아버지도 정리해고를 당했다. 그런 사회적 현상을 보고 고등학교 시절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남자로 태어나면 공대에 가야 하고, 군대 다녀와서 어학연수 갔다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생의 루트"라고 설명해 준 담임 선생님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래서 반발심이 들었고,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유일하게 있었던 중창단에 들어갔다. 고1 때 우연히 친구를 따라간 노래방에서 친구들이 나의 실력을 인정하며 끊임없는 구애를 한 이유도 있었다. 지금도 내가 중창단에 들어간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러운 반항심, 친구들의 구애와도 같은 권유, 중창단 선배 중 공부를 잘하고 서울대까지 간 선배가 있었기에 "노래하면서도 공부 잘할 수 있네?"라는 생각. 이 모든 것의 조합이었던 것 같다. 고2 때 중창단에 들어가서 테너와 바리톤을 넘나들며 방과 후 연습을 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그다음 시험에서는 반에서 2등, 전교에서 10등 안까지 다시 어느 정도 성적을 복원시켰지만, 방향성을 잃은 것 같은 무료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 맞이한 수능. 첫 번째 실패였다.
아버지의 정리해고로 집에 손을 벌릴 수 없는 상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집 가까운 그래도 공대로 조금은 유명했던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과외와 알바로 근근이 버티던 중, 영장이 날아왔다.
카투사를 가기 위해 토익시험을 보았지만, 다급함 속에서는 운도 전혀 따르지 않았다. 일명 '뺑뺑이'까지 떨어진 것이었다. 수능시험이라는 첫 번째 실패 이후, 연이은 두 번째 실패였다.
그런데, 병무청에 앉아있던 중 뒤에 포스터 하나가 보였다.
'조국은 그대를 믿노라.'
'무료로 먹여주고 재워줌. 의무복무 기간 동안 능력 여하에 따라 국내외 대학원에 보내줌.'
이 말이 끌렸다. 무언가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삶의 시나리오를 다시 써보기로 했다.
'저곳에 가서 일단은 장교가 되자. 그리고 외무고시를 봐서 합격한 다음 전역하자.'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사관학교'에 간다면 관심도 없고 이해조차 할 수 없던 나였다. 그러나 나의 절박함은 그렇게 나를 고통을 앞둔 운명의 문턱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지난 25년 전 실패를 돌이켜보면, 후회는 없다. 철없던 내가 많이도 성장했다는 것을 느낀다. 실패의 그림자는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늘 내 발목을 붙잡고 따라다녔다.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SKY에 다녔고, 대학 시절 친구들은 모두 대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잘 살고 있기 때문이었었다. 그러면서 늘 되뇌었다.
"어느 곳에서든 실력으로 증명하자. 진정성으로 기여하는 사람이 되자."
결국 나는 그림자와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나는 '통역'이라는 우연한 계기로 군단장 전속 부관(비서)가 되었고, 군대에서 보잘것없는 나를 택해 두 번이나 미국에 군사유학을 보냈다. 미군과 연합작전을 하기도 했고, 아랍에미리트 군인들에게 우리의 군사교리를 가르치면서 방산무기를 홍보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30명을 이끄는 소대장, 150명을 지휘하는 최동북단 중대장, 500명을 지휘하는 최전선의 대대장을 경험하며 부하들이 '비전'을 갖고 자긍심을 갖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20년 동안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나라가 안전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