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위기

불현듯 찾아온 터닝포인트

by 에뜨왈


"너 통역해. 이미 보고했어."


2008년 7월 초,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네? 인사참모님, 저보고 통역을 하라고요?"


"응. 이미 상부에 보고했다. 준비해. 7월 14일이야."


"저 통역 못하는데요?"


"너 군사영어반 나왔잖아. 그럼 다 하는 거 아니야?"


"그거 6개월 교육인데요? 외국에서 살다 온 통역장교 있잖아요."


"통역장교가 입원했대. 몰라. 그리 알아. 이미 보고했어. 준비해!"


뚝. 전화가 끊겼다.




베티고지 전투 55주기 기념행사


내가 통역을 맡게 된 행사는 보통 행사가 아니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6.25 전쟁 당시 1953년 7월 15~16일,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의 베티고지에서 국군 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35명의 소대원이 중공군 2개 대대(약 800~1000명)의 공격을 18시간 동안 19회에 걸쳐 격퇴한 전투


이 전투에서 태국군이 함께 싸웠고, 2008년은 한-태 수교 50주년이었다.

그래서 태국에서 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다. 군단장, 사단장, 외국 무관들까지.

당시 나는 중위였다. 군사영어반을 나오긴 했지만, 아직 익숙지 않았고 외교적 측면까지 고려해야하는 통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루를 걱정하고, 엿새를 준비하다.


'어떻게 하지? 정말 망하는 거 아니야?'

하루는 그냥 걱정으로 보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데 다음날, 생각을 바꿨다.

"그래, 해보자. 망치면 어때? 내 탓이야? 시킨 사람 탓이지."

그리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7월 14일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날까?'


1. 날씨 이야기를 할 것이다. 기상예보를 확인했다. 맑음. "오늘 날씨 참 좋네요."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2. 베티고지 전투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전투가 있었던 장소, 병력 규모, 전투 경과를 영어로 외웠다.

3. 태국은 불교 국가다. 스님의 계급 명칭, 불교 용어를 찾아 정리했다.

4. 군단장님 기념사를 미리 받아야 한다. 군단 정훈공보부에 사흘을 졸라서 기념사 원고를 받았다. 번역하고, 달달 외웠다. 마치 동시통역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5. 돌발 상황을 대비한다. "화장실이 어디죠?", "물 한 잔 주시겠어요?" 같은 기본 회화부터, "전사자를 추모하며" 같은 격식 있는 표현까지.


오만 가지 상상력을 동원해서 준비했다.




2008년 7월 14일, 연천의 태풍전망대


행사 당일.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태국 고위 인사들이 도착했다. 스님도 계셨다. 미군, 호주군, 뉴질랜드군과 무관들도 왔다. 그들은 원어민이었다.

'내 발음이 우스울 거야. 문법도 틀릴 거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입이 열렸다.

준비했던 문장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날씨 이야기, 베티고지 설명, 불교 용어, 군단장님 기념사.

중간중간 막히기도 했다. 분명 실수도 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계속 말하자.'

행사가 끝났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원어민들이 비웃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막힘없이 해냈다.





"자네 어디 소속인가?"


행사를 마친 뒤 외국인사들이 자리를 떠나고, 당시 군단장님이 나에게 다가와 질문을 했다.


"자네는 어디 소속인가?"


"네. ㅇ기갑여단 소속 오 중위입니다."


"외국에서 살다왔나?"


"아닙니다."


군단장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충성! 또 무슨 일이십니까? 이젠 진짜 못 합니다."


인사참모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또 무슨 일을 시키려나 싶어 겁부터 났다.


"그게 아니고... 너 군단장님 전속부관으로 오래."

전속부관 : 장성급 지휘관을 보좌하여 신변 보호와 사무 연락을 전적으로 맡아보는 참모 장교. 쉽게 말해 비서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그렇게 군단장 전속부관이 되어 있었다.


위기가 아닌 터닝포인트


그때 나는 깨달았다. 위기는 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위기라고 생각했던 그 일주일은, 인생의 방향을 바꾼 터닝포인트였다.

만약 내가 "못 합니다"라고 거절했다면?
만약 준비 없이 그냥 갔다면?
만약 중간에 막혀서 멈췄다면?

그 순간, 나는 배웠다.

준비는 상상에서 시작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멈추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위기는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찾아온다.

"망치면 어때? 그 사람 탓이지."

그 가벼운 마음가짐이 나를 움직이게 했고, 그 움직임이 인생을 바꿨다.

당신에게도 지금 위기가 찾아왔다면 그것은 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위기는 터닝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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