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소통 | 김주환
현대 뇌과학은 ‘나 자신’이 하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객체로서의 ‘나’와 그 객체로서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주체로서의 ‘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객체로서의 ‘나’를 경험자아라고 한다. 경험자아는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나의 모습, 즉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는 ‘나’를 뜻한다. 그리고 이 경험자아는 환경, 맥락, 그리고 사람 등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계속해서 모습을 바꾼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과 있을 때와 B라는 사람과 있을 때, 나의 모습에 차이가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경험자아를 뒤에서 바라보는 배경자아 덕분이다. 즉, 배경으로 존재하는 더 근본적인 자아가 있기 때문에 카멜레온처럼 외부 요인에 맞춰 모습을 바꾸는 경험자아를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자신의 모습을 영화관 좌석에 앉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처럼 '나 자신'을 경험자아와 배경자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 파도와 바다처럼 서로 구분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험자아와 배경자아 사이에는 끊임없이 소통이 이루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치 파도가 산소를 바닷속으로 순환시키고, 바다가 파도의 형성에 관여하듯 말이다.
이러한 경험자아와 배경자아 사이의 끝없이 이어지는 소통의 과정, 그 자체가 결국 '나'라는 것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나'라는 존재가 고정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경험에 대한 기억이다. 좀 더 엄밀하게는 의식에 의해 재구성된 경험이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모여 '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를 이루는 기억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의식을 통해 경험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엮어낸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나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의 집합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식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는데, 경험자아와 배경자아의 소통이 이에 포함되고, 이러한 유형의 스토리텔링을 내면소통이라고 부른다. 내면소통에서 관심 있게 살펴볼 주제는 어떻게 주체인 '나'가 객체인 '나'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지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경험에 대한 의식의 스토리텔링 과정을 최대한 왜곡 없이 합당한 방향으로 세팅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나에게 '나는 이렇다'라고 '진심으로' 선언하는 것에는 절대적이고도 즉각적인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진심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싶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나는 능력이 부족하다'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스스로에게 '나는 능력이 뛰어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진심으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이미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지금껏 '나는 능력이 부족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오던 사람은 그 스토리텔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가치확인'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글로 적어보는 것이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글을 통해 자신의 핵심가치를 내면화하고 그에 부합하도록 자신의 행동 패턴을 바꾸어나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이러이러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라고 '진심으로'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우리의 뇌는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경험을 그 자체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의식을 통해 의미부여를 하고, 그 의미들을 엮어서 하나의 스토리의 단위로 경험을 기억하며, 그 기억들이 결과적으로 '나'를 이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험자아와 배경자아의 상호작용, 즉 내면소통이 스토리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이를 이해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스토리텔링 과정에서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인 왜곡을 일으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장 문제이다. 식사를 하고 난 후 복통, 복부 팽만감과 같은 불쾌한 소화기 증상을 가져오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의 증상들이 급성으로 나타날 때, 속수무책으로 나의 스토리텔링 과정은 고장이 나버린다. 이러한 순간이 찾아오면, 나의 배경자아는 어떠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 열심히 세상과 상호작용하고 있는 경험자아를 방치해 두고, 장으로부터 비롯된 불쾌한 신체적 신호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나는 고장 나 버린다. 일단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위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봐야 하는 것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신체의 초기 대응 체계가 문제없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어떻게 보면 다행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어도, 그 장의 문제를 진압하기까지, 의식의 스토리텔링 과정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후에 그 기억은 뭉뚱그려져 '배가 아파서 고생한 기억'에 분류되고 만다. 사실 그렇게 분류되면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는 장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을 장의 문제 때문이라고 인지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떠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자아를 통해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정보와 아무런 의심 없이 연결시켜 버린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경험을 왜곡하여 부정적인 스토리로 만들어 기억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좀 과장을 보태자면, 이런 식의 기억은 '나'라는 존재를 흔드는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더욱더 예민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불가피한 장의 문제는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위장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말어미가 -톨로 끝나는 합성 감미료가 잔뜩 들어있는 제로 음료를 마시거나, 쓸데없이 굶어서 식욕을 엄청나게 끌어올려, 과식을 함으로써 불필요한 장의 문제를 일으키는 미련한 행동은 이제는 좀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이렇게 놓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까지 이렇게 놓친 의미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까지 이렇게 엉망이 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 글은 일종의 '자기가치확인'을 위한 글이다. '나는 나의 위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하기 위한 첫걸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