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목요일을 끝으로 주방 알바를 그만두었다. 원래는 자격증 준비를 하며 3개월 정도 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내가 일했던 곳의 근무 시간은 크게 오픈조, 중간조 그리고 마감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중간조에 배정받아 근무를 하였다. 그런데 사실상 이름만 중간조이지, 마감조와 함께 마감도 같이해야 했다. 대신 주 5일이 아닌 주 3일, 하루 8시간 근무였다. 그리고 그 3일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월수금과 화수목이 격주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월수금 근무는 중간에 텀이 있어서 할만했다. 그런데 문제는 화수목 근무였다. 근무가 3일 연달아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체력적인 부담이 쌓여갔다. 그래서 화수목 근무가 배정된 주에는 다른 것들은 할 수가 없었고, 오로지 휴식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대로 가다간 취업 준비의 기간이 늘어날 거 같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생각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일을 그만둔 것이다.
사실, 그 생각의 바탕에는 체력적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 거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휴게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8시간을 서서 노동하고, 심지어 마감까지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보든 나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있고, 일이 있는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면, 내가 알바를 했던 주방도 본질적으로는 직장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짧다면 짧았던 이 경험을 통해, 직장이라는 환경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미리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일에 몰두하고 있지만, 시선은 사람에게 가있는 사람, 직장에서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매우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에 몰두함으로써 감정을 끄고, 사람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지만, 서로 웃으면서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가며 그들에게서 왠지 모를 질투와 비슷한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 한마디로, 직장 내에서 나는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을 원하고, 그들과 연결되길 원하지만, 정작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는 모순적인 존재인 것이다. 스스로 판단해 볼 때, 이러한 나의 모습은 확실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즉, 편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정도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결국 이러한 나의 모습은 평생에 걸쳐 해결해야 할 어떤 숙제와도 같은 악습관이라고 할 수 있고, 나는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이미 알고는 있다. 알고 있지만, 매번 놓치는 것, 그것은 바로 수용이다. 수용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꽉 쥐고 있는 손을 피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어떤 무리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마치 완벽하고도 특별한 사람으로 왜곡해서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되어야 할 어떠한 목표로 삼고, 나와 그 사람을 비교하며, 내가 생각하는 나의 부족한 면을 비춘다. 결국 '나는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채워야지만, 누군가로부터 혹은 어떤 집단으로부터 받아들여지며, 인정을 받는다.'라는 믿음을 알게 모르게 쥐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사람이다.
이것의 반대인 수용은 완벽이라는 이상을 좇기를 멈추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미숙한 부분과 괜찮은 부분, 모두 나의 일부분이고,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형성한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감당하는 것, 그 자체로 나는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제서야 관계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