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는 호구라고 불렀다. 에바를.
-필리핀에서 온 직장동료. 에바.
에바와 민자는 1982년생이다. 민자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다. 에바는 싱글. 평생 남자 친구 한번 사귀지 못했다.
에바는 필리핀에 결혼한 오빠 하나, 여동생 둘과 엄마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연락이 끊어진 아빠.
캐나다 스타벅스는 2주에 한 번씩 돈이 나왔다. 2주마다 나오는 돈과 매주 나오는 팁을 합치면 한 달에 300만 원 정도 벌었다.
에바는 월급에서 100만 원을 꼬박꼬박 필리핀에 있는 엄마, 오빠, 동생들을 위해 붙였다. 한 달에 한번 코스트코에서 세제며 샴푸 같은 것도 사다가 필리핀에 붙였다. 그건 50만 원 돈이 들어간다 했다.
"아니, 샴푸를 왜 필리핀에 붙여? 그 무거운 걸. 돈 보낸 걸로 사서 쓰라고 해."
"캐나다 샴푸가 더 좋데. 그래서 보내는 거야." 에바는 누리끼리한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바보. 너 그걸 한국말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 호구. 호구라고 해. 이제 보내주지 마. 아니 결혼까지 한 오빠네 가족을 네가 왜 챙겨. 와이프 보고 하라고 해." 답답했다.
"아니 에바야. 이건 진짜 에바지. 에바야. 우리 나이가 이제 40이야. 네 밥그릇도 챙겨야지. " 민자는 에바에게 싫은 소리를 자주 했다.
에바는 스타벅스 일 말고 치킨 튀기는 일도 했다. 손등이며 팔목에 기름 튀긴 화상 자국이 남아있었다. 얼마나 뜨거웠을까?
"에바 어디 갔어?"
매일같이 출근하던 에바가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맘에 민자. 에바에게 연락을 한다.
"에바? 괜찮아?" 핸드폰 너머로 골골거리는 에바의 목소리가 들린다. "민자, 나 샤워하다가 미끄러졌어. 나 허리디스크가 있었는데 그게 심해졌어. 나 911이 올 때까지 화장실에 빨가벗고 누워있었어." 목소리가 잦아든다. 에바는 흐느끼고 있었다.
"괜찮아. 나도 애기 날 때. 다리 쫙 벌리고 있었어. 남자 의사들이 내 거기에다 손을 막 쑥쑥 집어넣고 애기 머리 만지고 그랬어. 괜찮아." 민자가 위로했다.
"근데 나 조만간 스타벅스 다시 나갈 거야. 우리 엄마가 돈 부치라고 해서. 나 돈 다시 벌어야 돼."
에바가 말했다.
"됐어. 돈을 붙이긴 뭘 붙여, 자기들이 돈 벌라고 해, 야. 네가 무슨 돈 버는 기계야? 오빠는 결혼도 했다면서 네가 왜 오빠 식구들까지 챙겨야 돼. 돈 보내지 마. 뭐라도 하라고 해."
민자 화가 났다. 아니 오빠라면서. 아니 엄마라면서 이러면 되나? 싶다. 캐나다에서 혼자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에바 가족들은 에바 등에 빨대를 아주 고슴도치처럼 촘촘히 꼽아 놨다.
"흐흐흐." 에바가 미련스럽게 웃는다.
"알았어. 이번달만 보내고 이젠 안 보낼게."
두 달이 지나고 에바는 진한 파스향을 풍기며 나타났다. "아이고 이 바보야. 쉬라니까." 민자가 말했다.
"나 돈이 다 떨어져 가서. 모아둔 돈이 없어. 돈을 다 필리핀에 보냈거든."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 에바가 서 있는다.
"바보."
민자는 한국에 가족이 있었다가 없어졌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치고받고 싸우는 게 싫어서 캐나다까지 도망쳐 왔다. 가족의 연을 끊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기로 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민자는 에바가 자신 같았다. 민자가 연을 끊지 않았다면 민자도 에바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끔찍해.“
민자가 눈을 감는다. 가족보다. 내가 먼저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래서 독하게 버텼고 버티다 보니 시간이 흘렀다.
"에바. 잊지 마. 무얼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네가 먼저야. 네가 먼저 행복해야 해. 그리고 가족이 있는 거야." 민자가 에바에게 말을 건넨다. 아니 민자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고 다짐이었다.
에바는 11월도 돈을 붙였다. 1000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