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삶에 끼워 넣는 일
정현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간 준희는 부엌으로 가 뒷정리를 했다. 접시들은 식기세척기에 넣고, 테이블을 닦고 나서야 거실 소파에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다들 잘 갔어?"
씻고 나온 은영이 물었다.
"응"
"술 좀 깼어?"
"그렇게 취하지도 않았어~"
"나도 좀 씻을까봐"
"그래"
"피곤하지?"
"막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고"
"조금"
"아!"
"..?"
"도영이가 내일 퇴근하고 저녁 먹재"
"아니~~"
"도영이네 회사가 우리 회사랑 가깝더라?"
"뭐어?"
"언제 그런 얘기까지 한 거야?"
"아까 잠깐 밖에 같이 치우면서~"
준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은영에게 장난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하루를 꽉 채워 보낸 일정에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안정을 취했다. 불행과 행복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치우치기 시작함을 느끼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정현은 피로에도 욕실로 먼저 향했다. 원체 깔끔한 성격에 지친 몸이지만 그대로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다. 파티로 핸드폰에 신경 쓰지 않는동안 부모님에게서 온 메시지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가볍게 씻고 나와 진통제를 한번 더 먹고서야 메시지에 답을 보냈다. '내일 한시에 가요.'
정현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친구들에게, 준희에게 티 내지 않으려 겨우 힘을 짜내 하루를 보냈다. 약에 취한 것인지, 쇠약해지는 기력 탓인지 고요 속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그를 깨운 건 핸드폰 벨소리였다. 한시에 보자던 정현의 말에 부모님은 일찍이 그를 재촉했다.
"여보세요"
"정현아"
"이제 일어났어?"
"우리 지금 내려간다고 하려던 참인데"
"몇시지"
"지금 열두시야"
"벌써?"
"..."
"피곤해?"
"그럼 좀 더 자고"
"밥은 천천히 먹을까?"
"아니에요"
"일어나서 씻기만 하면 돼"
"그럼 한시에 내려갈게"
정현의 아버지였다. 정현이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아내에게, 자식에게 너그럽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정현은 언젠가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버지처럼 하겠다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런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정현의 마지막 목표였다. 지금은 그들도 꿈꿨을 단란한 가정에 자신이 오점을 남기는 것만 같았다.
정현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벌써 열두시라고?'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부모님은 일어나 씻고, 나갈 채비를 할 동안 정현은 아무것도 모른채 어둠 속에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는 것도 이런 느낌일까.'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도 잠이 들었다 깨듯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믿음으로 살았던 시절이 불과 몇 달 전이다. 이제 조금씩 눈을 감는 것에 불안이 섞이고 있었다.
부모님은 한시 정각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현이 살고 있는 층에 내렸다. 그에 맞춰 정현도 문을 나섰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남편과 정현의 팔짱을 꼈다. 외동아들의 죽음에 대해 매일 밤 눈물을 흘렸지만 정현 앞에서는 덤덤하게 웃고 있었다. 그 옛날 아버지는 어머니만 보며 살겠노라 했지만 어머니의 바람으로 정현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위로하며 정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애쓸지는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약해지는 몸과 마음은 자꾸만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다 외치고 있었다. 불행했다.
아버지가 예약한 곳은 정현의 생일 때마다 갔던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야외뷰가 좋아 어머니가 좋아한 곳이었다. 정현의 생일이 한 달이 채 안되게 남았지만 암묵적으로 미리 생일파티 겸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음식이 세팅되면서 손바닥 크기 정도의 케이크에 초를 꽂아 같이 올려졌다. 레스토랑 직원은 기념일임을 예상하고 즉석카메라로 정현의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모레 입원하려구요"
식사를 시작하며 정현이 입원 계획을 밝혔다. 지금 그들이 제일 걱정하고 있는 것부터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정현아"
"오늘은 좀 어때?"
"진통제 때문인가"
"오늘은 좀 많이 잤어요"
"어제는 친구네에서 혜선이랑 도영이 다 같이 파티했어요"
"친구네?"
"누군데?"
"준희라고"
"캘리포니아 갔을 때 만난 친구예요"
"준희?"
"응"
"내일도 만나기로 했어요"
"많이 친해졌나보구나?"
"그 친구는 네 상태 알아?"
"응"
"알아"
"여자야?"
"그냥 친구예요"
"정현이 네가 좋아하는 거 같은데?"
정현의 아버지가 눈치를 챈 듯 정현에게 물었다. 정현은 바로 답하지 않고 스테이크 한 점을 먹었다.
"좋아하지"
"근데 그냥 좋아하는 게 다야"
"준희 만나게 되면 잘해줘"
정현이 말하는 그들이 만나는 날은 자신이 없는 자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를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를 반가이 여기길 바랐다. 정현은 부모님에게 준희를 만난 우연과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어쩌면 준희 입장에서는 선을 넘은 것이라 여길 이야기도 터놓았지만 정현은 그들이 과하지도 모자르지도 않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가 터놓은 진심을 준희도 이해하리라 믿었다.
#로맨스소설 #로맨스드라마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