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자리
정현은 부모님과 식사 후, 집으로 돌아갔다. 입원할 때 필요한 짐을 미리 싸놓기로 했다. 내일은 준희를 만나 캘리포니아에서의 사진을 찾고, 병원 밖에서 하는 마지막 만남일 것이라 짐작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속옷 몇 가지를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올해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았다. 해가 들 때면 가을 마냥 시원하기도 했다. 다음 겨울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과 거실, 부엌을 둘러보며 치워두어야 할 것들과 눈에 담아두고 싶은 것들에 집중했다. 서글픈 마음이 울컥 올라와 소파에 앉은 채 숨죽여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무도 없는 집에 소리 내 운다 한들 어느 누구 하나 마음 아프게 할 일은 없었지만 정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소리 내 운 적이 없다. 그때 그의 마음 끝을 건드리듯 준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부모님이랑 맛있게 먹었어?'
'내일 열두시에 보자!'
'사진 찾고 점심 먹으면 될 거 같아'
연달아 도착한 준희의 메시지에 정현의 삼키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침부터 무료하게 뒹굴거리던 준희는 정현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입원 계획과 부모님과의 식사 약속을 모두 들은 터라 먼저 연락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눈이 그치고 해가 떠 맑아 보이는 바깥 하늘에 준희는 서점이나 치울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긴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간편한 트레이닝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하늘은 맑지만 겨울은 겨울인지라 찬 공기에 잰걸음으로 서점으로 향했다. 도착한 준희는 서점 문을 활짝 열어 환기부터 시켰다. 그리고 먼지가 쌓인 전기히터 위를 대충 털어내고 콘센트를 꽂아 불을 피웠다.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커피머신을 작동시키려 서랍에 넣어둔 마른 수건을 꺼내 먼지를 닦아내 전원을 켰다. 그리고 집에서 가져온 원두봉투를 뜯어 머신 통에 들이부었다. 쏟아낸 원두향과 열어둔 문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섞였다. 몸을 돌려 바로 뒤에 있는 싱크대에 탬퍼와 포터필터를 씻어 내고는 마른 수건으로 닦아냈다. 사용한 지 꽤 지난 탓에 시험 작동으로 뜨거운 물을 두어번 흘려보냈다. 그리곤 찬장에서 잔을 꺼내 뜨거운 물을 담고 샷을 바로 내렸다. 좁은 서점은 금세 커피향으로 가득 찼다. 준희는 잔을 손으로 감싸며 손을 녹였고, 바로 한입 마셨다. 그때 카운터에 꽂아 둔 책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준희는 커피잔을 내려두고 편지봉투를 집어 들어 안에 든 편지지를 꺼냈다. 내용을 채 읽기도 전, '준희야, 나 정현이야'라고 쓰인 첫 문장에 양쪽 눈에서 옹글종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
빼곡히 적힌 편지 한 장을 모두 읽은 준희는 주저앉아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그가 하는 위로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는 정현과 나눠 가진 서핑보드모양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준희 것이 아닌 편지봉투에서 꺼낸 목걸이였다. 그렇게 한참을 마음을 다스리며 앉아 있었다. 뜨거운 히터 열기 사이로 찬 바람이 강하게 들어오며 준희의 잔머리들이 날렸다. 준희는 몸을 일으키다 쥐가 난 한쪽 다리에 살짝 휘청 거렸지만 다시 자세를 잡고 목걸이는 주머니에 넣었다. 복잡한 마음에 그대로 집에 갈까 싶었지만 왜인지 서점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신 밑 수납장에 있는 먼지떨이개를 꺼내 먼지라도 털 겸 진열대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책들 사이로 조심스레 먼지를 털다 다시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한숨을 내쉬고 멍하니 공중으로 시선을 던지다 히터를 끄고 서점을 나설 준비를 했다. 준희는 집으로 가는 길에도 한 번씩 눈물을 닦아 냈다. 말랐다 싶으면 한 번씩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살갗이 붉어졌다. 집에 도착한 준희는 겉옷만 벗고는 이불속에 몸을 감췄다.
얼굴 쪽으로 이불을 움켜쥐고 눈앞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보다 정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미 편지를 봤다고 해야 할까 모른 척해야 할까 고민 끝에 그의 의도에 따라 아무렇지 않은 척 내일 약속을 상기시켰다.
준희는 약속 당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있었다. 실은 좀 더 일찍 만나고 싶었지만 그의 컨디션을 생각해 아침잠을 보채고 싶지 않아 정한 시간이 열두시였다. 준희는 정현 앞에서 갑자기 눈물이 흐를까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자연스럽게'
준희는 평소처럼 화장을 하고 추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옷을 더 두텁게 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서 눈을 감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준희는 현상소로 가기 전, 근처 쇼핑몰에 들러 수면양말을 골랐다. 병실에서 발이 시릴까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에게 어울릴 만한 무난한 디자인의 네켤레와 귀여운 디자인의 두켤레를 골랐다. 잠깐이라도 그가 순수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희는 작은 봉투에 양말을 모두 담아 현상소 앞으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현상소 앞에 도착한 준희는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가 되기 10분 전,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두시, 그는 도착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준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추운 바깥공기에 덩달아 붉어진 볼과 코, 그리고 입에서는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준희는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