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어느덧 시원하기만 한 아침 바람과 따스한 햇살로 해가 길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품이 큰, 아래 위 하얀색의 가벼운 옷차림을 한 준희가 서점 유리문을 활짝 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서점의 문 아래 틈새, 이름 모를 꽃이 하나둘 피어오르고 있었다. 예년보다 이르게 따뜻해지면서 식물들도 따라 자라나고 있었다. 준희는 길었던 머리를 귀밑까지 일자로 잘라내어 시원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오늘은 닫았던 서점을 다시 오픈하는 날이다. 연락이 닿아있던 몇몇의 지인들에게만 오픈일을 알렸고, 부담스럽지 않게 그들을 초대했다. 가게 가운데를 채우고 있던 진열대를 작은 크기로 바꿔 대여섯명이 둘러앉아 있을 수 있는 탁자와 의자를 놓았다. 탁자 위에는 쿠키와 크래커 몇 가지가 놓여 있다. 준희는 오픈을 위해 어제 미리 청소를 끝내두었지만 빗자루를 꺼내 바닥을 한번 더 쓸어냈다. 창을 통해 비치는 서점 내부는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단정한 분위기를 맑게 바꾸듯 경쾌한 발소리가 들렸다.
"준희야~"
은영과 혜선이 소리 내지 않았지만 웃음 가득한 얼굴로 서점에 들어섰다. 혜선의 품 안에는 꽃다발 한아름이 들려 있었다. 준희의 집에 처음 오던 날처럼 혜선은 꽃다발을 준비했다. 은영은 서점 안을 둘러보며 그동안 혼자 정리하느라 고생한 준희에게 연신 감탄했다. 도와주겠다던 그녀들을 만류하고 준희는 하나씩 정리하며 오픈을 준비했다.
"커피 내려줄게"
"뭐 마실래?"
준희는 머신 앞에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준희를 대신해 혜선이 꽃병을 찾으며 꽃다발을 풀어냈다. 혜선은 화병 가득 꽃을 꽂아 탁자에 올리고 의자에 앉았다.
"도영이는?"
"곧 올 거야"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다 만든 준희를 보고, 은영이 두 잔을 받아 들어 혜선에게 전달하던 차에 도영이 서점으로 들어섰다.
"오"
"좋네~"
도영의 목소리에 셋은 문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도영의 손에는 와인 한 병과 케이크가 들려있었다. 준희는 도영에게 어떤 커피를 마실건지 묻고는 머신을 한번 더 작동시켰다. 도영은 자연스럽게 은영의 옆으로 가 앉았다. 도영의 커피를 들고 자리로 간 준희는 케이크 상자를 뜯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들이 모두 모여 둘러앉은 것은 정현의 장례식 이후 처음이었다. 간간히 따로 만나거나 연락을 취하기는 했지만 한자리에 모두 모인 것은 두 달 만이었다.
그날 정현은 부모님에 의해 병원에 옮겨진 후였다. 한참 감정을 쏟아낸 정현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고, 다음날 고통 속에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는 컨디션을 살피기 위해 연락한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못했고, 걱정된 부모님이 정현의 집으로 찾아갔었다. 문을 열고 들어 간 방에는 기절한 것인지 정현은 정신이 들지 않았고 바로 이송되었다. 의식은 희미했고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흐느끼는 준희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정현을 업어 들고나가는 아버지를 따라나서며 어머니는 침대에 놓인 그의 핸드폰을 챙겼었다. 어머니는 정현의 옆에서 하염없이 그의 손을 매만지며 눈에 담던 순간, 가방에 넣어둔 정현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준희'라는 두 글자에 정현이 얘기했던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은 이유였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준희의 떨리는 목소리에 동화되듯 어머니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감정을 삼키며 병실을 알려주었다. 그게 정현의 부모님과 준희의 첫 만남이었다. 붉어진 눈과 창백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선 준희는 그날따라 더 부서질 듯 가녀려 보였었다.
은영과 혜선, 도영은 서점 오픈을 축하하며 각자 정현의 부재에 대한 그간의 슬픔과 일상을 공유했다. 그 크기는 달랐지만 이렇게 모일 기회가 생긴 것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침표를 찍은 듯 서로를 향해 편하게 웃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은 옅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존재가 남긴 흔적은 그대로 굳어 각인되었다. 그와 나눈 펜던트 목걸이 그리고 편지, 영영 혼자 볼 수밖에 없는 사진들. 준희는 언제까지 이것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정현의 편지대로 가보려 한다. 그의 마지막 응원과 위로를 온전히 받는 것이 그녀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다. 아버지를 잃고 후회한 그날로부터 소중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준희의 결심은 정현의 부재에도 이어졌다.
한참을 올여름 여행계획으로 대화가 이어지던 때, 화분을 든 배달 기사가 서점으로 들어섰다.
"여기 한준희씨 계세요?"
그 배달기사는 성인여자의 어깨 정도까지 오는 높이의 홍콩야자 화분을 서점에 들여놓았고, 준희는 어리둥절하게 다가갔다.
"저예요"
"이건 뭐예요?"
"보자.."
"박승원씨라는 분이 보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