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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규 Oct 15. 2024

영혼을 믿으세요?

매일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은 남향의 거실 창으로 햇살을 내리쏘다가 서쪽 너머로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진 태양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아침이면 다시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나는 항상 제자리다.

 

6시에 기상해서 아침을 먹은 후 그날 쓸 원고에 대한 자료 수집을 하고, 점심을 먹고 원고를 쓰고, 저녁을 먹은 후 게임을 하고 TV를 보다 밤 11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하는 것이라곤 단풍이야기에서 키우는 B라코차의 경험치와 레벨뿐이다.

 

이제 더 이상 보라매날다를 볼 수 없지만, 나는 다시 단풍이야기를 한다.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딴 생각이 들지 않아서다. 아니, 이제는 B라코차가 강한 전사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내 삶의 유일한 낙이어서다.

 

경험치를 쌓아서 레벨을 올리고, 그에 맞는 아이템을 구해서 업그레이드를 해주면 예전에는 감히 맞서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보스 몬스터들을 B라코차는 척척 해치운다.

 

단풍이야기를 해보니 요즘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다.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더 많다. 그런데 게임 속 세상에서는 열심히 노력만 하면 레벨 업이라는 보상이 반드시 주어지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에 B라코차의 성장은 한줄기 빛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 매일 변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남향의 창들로 비집고 들어와 바닥에 비쳐지는 햇빛의 길이다. 소울이가 떠났을 때만 해도 정오 무렵 주방의 식탁 밑까지 파고들던 햇빛이 이제는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 장식장의 중간 정도만 비추다가 사라질 만큼 짧아졌다.


오늘 우리 동네의 남중고도는 65도 5분 38초다. 일주일 새 2도 48분이나 높아졌다. 우리 집안을 비추는 태양은 하지 때까지 점차 고도를 높여갈 것이다. 고도가 높아지는 만큼 집 안으로 스며드는 빛의 길이는 짧아진다.


아니다. 고도를 높이는 주체는 태양이 아니다. 23.5도로 기울어진 지구가 움직이면서 햇빛의 고도를 바꾼다. 하지만 나는 지구에 있으니 태양이 돈다. 내가 수성에 있으면 지구와 태양이 돌고, 다른 은하에 있으면 우리은하가 돌게 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이 겪는 세상은 개인의 관점에서 돌아간다. 지구에 사는 80억 명의 세상이 각각 80억 개의 관점에서 빙빙 돌아가듯이 우리은하에 있는 1000억 개의 별들에서는 1000억 개의 다른 우주가 돌아가고 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주위를 돌던 80억 개의 세상이 사라지고, 1000억 개의 우주가 사라지는 셈이다. 하지만 그 한 명만 사라졌을 뿐 여전히 80억 명과 1000억 개의 관점에서 세상과 우주는 빙빙 돌아간다. 그래서 죽음은 슬프다. 지독한 외로움이다.

 

날로 높아지는 B라코차의 레벨과 날로 짧아지는 햇빛의 길이 외에도 내 일상에서 매일 달라지는 게 또 있다. 텔레비전만 켜면 뉴스 채널에서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이다. 어쩜 그렇게 매일 새로운 사건과 사고들이 벌어지고, 그에 따른 이슈와 논쟁들이 부각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고정되어 있는 일상을 중심으로 빙빙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나는 오늘도 뉴스를 켠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터넷 매체 중의 하나인 누리뉴스의 구독자들에게 한국뇌과학연구원이 해킹을 당해 주요 연구성과들이 유출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발송되어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그 기사에 의하면 해킹을 당한 연구성과 중에는 최석우 박사의 최근 연구성과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누리뉴스 측은 자신들이 그런 내용의 기사를 작성하지도 않았고 발송한 적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누리뉴스의 콘텐츠 관리 시스템이 해킹 공격을 받아 그런 가짜뉴스가 송출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저희 취재진이 한국뇌과학연구원에 그 기사 내용대로 해킹을 당한 적이 있는지 문의한 결과, 정확한 답변은 듣지 못했습니다. 한국뇌과학연구원의 상급기관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역시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아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최석우 박사의 연구성과에 대한 해킹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만약 누리뉴스의 가짜뉴스 내용대로 최 박사의 연구 성과가 해킹을 당해 외부로 유출되었다면 정부에서 기대하고 있던 뇌 과학 성장 관련 로드맵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한국뇌과학연구원의 해킹 사실 여부와 관련 없이 누리뉴스의 콘텐츠 관리 시스템을 해킹해 가짜뉴스를 퍼뜨린 이들의 정체와 의도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커지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등의 해외 주요 언론들도 이 사실을 속보로 보도하면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뉴스를 처음 듣는 순간, 이제야 KBSI의 해킹이 보도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여전히 정부는 KBSI의 해킹 사실을 숨기고 있고, 이 사실을 퍼뜨린 건 또 다른 해커다. 해킹 사실을 해킹해서 알리다니 아이러니하다.

 

아니면 자신이 감행한 해킹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뉴스 매체를 또 다시 해킹해서 알린 것일까. 그렇다면 KBSI와 누리뉴스를 해킹한 이는 동일인이다.


누리뉴스의 해킹 소식을 알리는 뉴스를 본 지 두 시간 후 나는 집을 나와 택시를 탄다. 목적지는 서초구 염곡동의 한 공원이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는 모른다. 저번의 폭행 사건 이후 지하철을 타는 게 꺼려지는 것도 있지만, 내가 택시를 탄 건 최종 목적지를 몰라서다.


그런데 양재역을 막 지난 다음부터 길이 막힌다. 그냥 교통정체가 아니라 마치 명절 때 귀성차량 행렬처럼 자동차들이 양방향 도로를 꽉 메워서 멈춰 있다. 택시의 이동속도는 10분당 약 100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휴대폰의 착신음이 울린다.

 

“지금 어디신가요?”


“양재역 지나서 시민의 숲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도착 예정 시간이 언제인가요?”


“글쎄요. 지금 차가 하도 막혀서 확답을 못하겠네요.”


“전화번호를 하나 보내 드릴 테니까 염곡동 느티나무공원에 도착하신 후 그 번호로 연락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백미러로 통화 내내 나를 힐끗거리던 택시 기사가 입을 연다.


“약속이 있으신가 봐요. 아이고, 여기 이 시간에 이리 안 막히는데 오늘 왜 이런지 모르겠네요.”


“아, 네. 어쩔 수 없죠.”


그때 또 휴대폰이 울린다. 이번엔 내가 아니라 기사의 휴대폰이다.

 

“어, 그래. 나 운행 중이지. 너 어딘데? 그래? 나도 지금 양재동이야. 아이고, 오늘 왜 이러냐? 뭐? 승택이도 양재동에 있다고? 왜 오늘 다 이리로 와서 난리들이야. 그래, 하여튼 수고하고 운행 끝나거든 연락할게. 그래, 알았어.”


통화를 마친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보며 말한다.


“손님, 오늘 무슨 날인가 봐요. 우리 동료들도 이 부근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고 하네요. 정 급하시면 내려서 지하철 타셔도 돼요.”


“아니에요. 그쪽으로 가는 지하철도 없잖아요. 좀 늦어도 괜찮으니 그냥 가주세요.”


“네, 그러죠. 저도 어차피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니까요. 허허허.”


성격 좋은 택시 기사가 날 느티나무공원에 내려준 건 그로부터 50분 후다. 평소라면 10분도 안 걸릴 거리를 5배가 넘는 시간이 걸려 도착한 후 나는 좀 전에 메시지로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건다.


“느티나무공원 앞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사람을 곧 보내겠습니다.”


정장 차림의 사내가 차를 몰고 와서 나를 태우고 간 곳은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단독주택이다. 현관으로 들어서서 응접실 같은 곳을 지나 왼편 첫 번째 방으로 정중히 안내한 후 사내는 문을 닫고 나간다.


양쪽으로 의자 두 개가 놓인 책상이 마주보게 배치된 방의 오른쪽 구석에는 조그만 테이블에 1인용 소파 두 개가 역시 마주보고 놓여 있다. 잠시 후 오늘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드시지는 않으셨어요?”


“차가 막혀서 제가 좀 늦었어요.”


노트북이 놓인 책상 쪽으로 앉은 그녀는 나를 맞은편 의자에 앉게 한다.


“영혼을 믿으세요?”


“무슨 영혼이요?”


“그냥 영혼 그 자체 말이에요.”


“죽음 이후의 넋을 말하나요, 아니면 사람의 의식을 관장하는 비물질적 실체를 말하나요?”


“둘 다를 의미한다고 해두죠.”


“의식을 관장하는 비물질적 실체야 당연히 있는 것이고, 믿느냐고 질문하는 걸 보니 죽은 사람의 넋을 말하나 봐요.”


“영혼을 왜 그렇게 나누어서 생각하시는 거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영혼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까요.”


나를 여기까지 불러서 질문을 던지는 이는 한빛나리다. 국가사이버안보센터의 최연소 팀장이자 천재 해커로 알려진 그녀는 만나자마자 종잡을 수 없는 질문부터 쏟아낸다.

 

“의식을 관장하는 비물질적 실체부터 이야기해 보죠. 이 개념의 영혼은 왜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개념의 영혼은 바로 생명 그 자체니까요.”


“그럼 생명은 무엇인가요?”


“살아 있는 것이죠.”


“살아 있는 것의 정의가 무엇이죠?”


“무엇을 알고 싶은 건가요?”


천재 해커는 집요하다. 나는 그 집요함보다 질문의 요지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생명체인 것과 생명체가 아닌 것과의 구분법에 대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내가 왜 그것에 답해야 하나요? 나를 조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성장을 하고 번식을 하면 생명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성장하고 번식하면 모두 생명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런 건 생물학자들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텐데요.”


“민 선생님도 생물학자 아니신가요? 거기에다 유전학과 분자생물학까지 공부하셨으니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셨을 것 같아서요.”


“전 이제 칼럼과 책을 쓰는 작가일 뿐입니다.”


“바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티에라’라는 인공생명체 말이에요. 디지털 공간에서 끊임없이 자손을 낳아 퍼뜨리는 이 자기복제 프로그램은 슈퍼컴퓨터로도 불가능할 만한 일을 단숨에 해냈죠. 놀라운 번식 능력과 약탈 능력을 지닌 초미니 후손들을 탄생시켰으니까요.”

 

“아, 티에라요…….”


내가 쓴 칼럼이다. 한빛나리는 지금 내가 쓴 디지털 인공생명체 칼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선생님은 티에라가 왜 캄브리아 폭발에 실패했다고 보시나요?”


“그 이유는 칼럼에 적혀 있을 텐데요. 티에라가 갇힌 디지털 환경 자체가 생물의 다양화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좁았기 때문이라고요.”


“그럼 티에라를 좀 더 넓고 복잡한 환경으로 옮긴다면요. 인터넷처럼 열려 있는 공간 말이에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 칼럼의 요지는 그게 아니잖아요.”


“아, 그렇죠. 티에라 실험은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고요. 지금 과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건 양자 모델의 인공생명체라고 하셨죠.”


“주목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실험을 하는 과학자가 있다고 했을 뿐이죠.”


“양자 상태의 인공생명체는 2큐비트 상태로서, 하나는 유전자형이고 다른 큐비트는 표현형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 같은 양자 상태의 얽힘을 영혼에 비유하셨더라고요.”


“그건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일 뿐이라고 해두죠. 근데 그게 왜 중요하죠?”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뭐가요?”


“보라매날다의 해킹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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