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난 B라코차의 240레벨 만들기에만 집중했다. 다행히도 매주 2회 써야 하는 정기 칼럼 외에 다른 원고 청탁은 없었기에 집필 시간 외에는 오롯이 게임에만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단풍이야기의 내 게임 캐릭터 수준에 맞는 추천 사냥터를 검색해 레벨을 빨리 올릴 수 있는 방법도 찾아냈다.
마침 단풍이야기에서는 신학기를 맞아 특별 이벤트를 실시 중이다. 나는 경험치를 2배씩 올려주는 쿠폰과 함께 사용하는 순간 1레벨을 올려주는 특별 아이템을 획득해 게임을 다시 시작한 지 꼬박 이틀 만에 B라코차를 240레벨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소울이가 떠난 후 안방의 벽시계는 마치 배터리가 다 닳은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그런데 지난 이틀간 벽시계는 다시 생기를 되찾은 듯 시계 바늘을 힘차게 돌렸다.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 사이의 차이가 이처럼 크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물론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수시로 보라매날다의 동향을 파악한다. 소울이, 아니 보라매날다는 간간이 들어와 처음 내가 찾아냈던 그 장소 주위를 여전히 맴돌고 있다.
나는 240레벨이 된 B라코차를 보라매날다가 드나드는 ‘셀라스, 별이 잠긴 곳’이라는 마을로 이동시킨 다음, 현재 보라매날다가 있는 장소로 표시되는 ‘별이 삼켜진 심해 3’이란 곳으로 찾아간다. 포탈 구멍을 통해 그곳으로 입장하니 캐릭터 하나가 그곳의 몬스터들을 열심히 사냥하고 있는 게 보인다. 보라매날다다.
내가 옆으로 다가가니 보라매날다는 사냥을 멈추고 잠시 나를, 아니 B라코차를 바라보는 듯하다. 나는 캐릭터의 표정을 나타낼 수 있는 기능키를 눌러서 보라매날다를 향해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자 보라매날다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정확히 보았다. 보라매날다가 데리고 있던 노란색의 펫을, 그리고 그 펫이 ‘햇살’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것을…….
햇살은 우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다. 털 색깔이 마치 봄날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처럼 밝은 노란색을 띠고 있어서 소울이가 지어준 이름이다. 햇살은 약 9개월 전에 우리 집에 왔으므로 소울이와 내가 한창 단풍이야기를 할 때라면 그런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
또한 소울이는 펫에게 따로 이름을 지어준 적도 없는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소울이의 캐릭터를 훔친 사람이 하필이면 햇살이라는 펫을 데리고 있다니…….
나는 즉시 온라인 친구 찾기 메뉴를 통해 보라매날다가 방금 어디로 갔는지 알아낸다. 이동한 장소는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다. 나는 순간 이동 아이템을 사용해 그곳으로 이동한다. 나를 알아본 보라매날다는 이번에도 역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다시 친구 찾기 메뉴를 켠다. 혹시 로그아웃을 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보라매날다는 온라인 상태다. 그가 있는 곳이 ‘슬리피우드’로 표시된다. 예전에 소울이와 함께 자주 드나들던 곳이어서 나도 잘 아는 장소다.
나는 즉시 그곳으로 B라코차를 이동시킨다. 그런데 아무리 구석구석 뒤져도 보라매날다가 보이지 않는다. 친구 찾기 메뉴를 다시 확인하니 분명 이곳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문득 한 곳이 생각난다. 이 곳에 있는 호텔 속의 고급 사우나실. 소울이가 즐겨 찾던 장소다. 약간의 메소를 지불하고 입장해야 하는 곳이어서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곳으로 들어가 보니 정말로 보라매날다가 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자마자 또 다시 보라매날다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시 친구 찾기 메뉴를 켠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보라매날다가 그새 로그아웃 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햇살처럼 노란색의 펫에다 햇살이라는 명찰을 달아서 데리고 다니며, 소울이가 예전에 즐겨 찾던 게임 속의 장소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소울이와 가장 친했던 친구일까. 만약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소울이의 게임 캐릭터를 해킹했다면 그런 기막힌 우연의 일치가 겹칠 확률은 저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처럼 항성의 골디락스 존에 위치한 행성을 발견하는 확률보다 더 낮을 것 같다.
소울이의 게임 캐릭터를 도용하고 있는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던 나는 게임회사에 해킹 여부를 문의하기로 마음먹고 이메일을 보냈다. 이틀 후 단풍이야기의 온라인 고객지원센터에서 나의 문의에 대해 이메일로 보내온 답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단풍이야기 온라인 고객지원센터 오현주입니다. 우선 이용에 불편을 끼쳐 드린 점 정중히 사과드리며, 문의하신 사항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당사에서도 해킹의 원천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시스템 작업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발생한 점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고객님과 같이 해킹의 피해를 겪은 고객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당사에서는 ‘해킹 추적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비스는 이메일로 접수가 어려우니 ‘성함, 연락처, 계정 이메일, 서버명, 캐릭터 아이디, 2차 비밀번호 설정 여부, 계정 공유 여부, 해킹 추정일, 임시차단 여부, 해킹된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시고 고객지원센터로 직접 전화하여 문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문의 주실 때에는 게임 내에 등록된 본인의 주민등록증(또는 운전면허증)을 소지하신 상태에서 전화하셔야 하며, 미성년자는 주민등록초본이나 여권을 당사 고객센터 팩스로 보내주신 후 전화하셔야 상담이 가능한 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피해 접수는 해킹 피해일로부터 7일 이내에 전화로 문의해주셔야 하며, 2차 비밀번호가 설정되지 않은 경우에는 접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임시 차단을 원하신다면 해킹 조사가 종료될 때까지 차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추적이 가능하지 않은 아이템에 대해서는 복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단풍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피해 당사자가 아니다. 또한 해킹으로 인한 피해도 없는 상황이다. 블랙 해커들이 이런 게임을 해킹하는 주목적은 비싼 아이템을 훔쳐가거나 게임 속 화폐인 메소를 털어가기 위해서다.
나는 소울이가 그런 피해를 당했는지부터 일단 확인해보기로 한다. 보라매날다가 비접속 상태일 때를 틈타 소울이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로 로그인해 아이템이나 메소가 털렸는지 살펴본 결과 피해를 당한 흔적이 전혀 없다. 게임 회사에서 복구해줄 피해 사실이 아예 없는 상황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회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상담원에게 누가 우리 아들인 척하면서 게임을 몰래 하고 있다는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도 없다.
그 녀석이 말이죠, 우리 아들이 평소 잘 드나들던 장소도 귀신처럼 알고 있고 글쎄 아들이 가장 귀여워하는 햇살이도 데리고 다니지 뭐예요. 어떻게 이 녀석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면, 고객님 저희가 고객님의 마음에 불편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아드님을 사칭하는 범인을 잡아서 정체를 밝혀 드릴 테니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대답해줄 리가 만무하다.
그것보다도 일단 전화를 받을 상담원에게 이 같은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시킬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게임회사에 전화를 거는 대신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 전화를 건다. 아니, 정확하게는 거기에 근무하는 서병린 경사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
“매형, 어쩐 일이세요? 잘……, 지내시죠?”
약간의 걱정과 연민이 섞인 듯한 어투로 전화를 받는 이는 바로 소울이의 장례 절차와 복잡한 사후 처리를 도맡아 해준 처남이다.
“병린아, 지금 통화 가능해?”
“네, 오늘 비번이어서 지금 집이에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저기, 말이야. 너한테 부탁 하나 하려고…….”
누구한테, 그것도 당사자의 업무와 약간이라도 관련된 부탁을 하는 것에 대해 끔찍하리만치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나는 처남에게 그동안 단풍이야기에서 일어난 사건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소울이의 아이디로 누가 로그인해서 게임을 하고 있으며, 나만 마주치면 달아난다. 이상한 것은 그 녀석이 데리고 다니는 펫의 이름이 햇살이고, 더구나 소울이가 자주 다니는 게임 속 장소까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게임회사에 해킹으로 신고하려고 하니 피해 사실이 없으며, 만약 신고로 인해 그 아이디가 계정 정지되면 소울이와의 추억도 영영 사라질 것 같아 걱정이다. 처남이 그쪽 방면으로 전문가이니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 좀 알려주면 좋겠다, 라고.
“제가 보기엔 누가 소울이의 아이디를 해킹해서 매크로 사냥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아, 매크로 사냥이란 불법적인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고스펙의 아이템 등을 취하는 행위를 말해요. 누가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 알려면 아이피 주소를 추적하면 되는데요, 사실 그게 간단치가 않아요. 그런 녀석들은 브이피엔 같은 기술을 사용해 자신의 아이피 주소를 숨기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또한 아이피 추적이 비교적 어려운 피시방을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아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실제 위치를 추적할 방법은 있는데, 그게 좀……. 소울이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는 접속자의 아이피를 추적하려면 게임회사나 인터넷 회사에 공문서를 보내 수사 협조를 구해야 하거든요. 매형 말씀을 들어보니 현재는 딱히 범죄 정황이 없는 것 같으니 그런 절차를 밟을 수도 없을 것 같고……. 하지만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 보세요.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내가 그렇게 된 이후 처남은 나를 대할 때마다 조금 어려워했는데, 소울이 사건으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예전 같으면 범죄자 잡기도 바쁘다며 딱 잘라 거절했을 텐데, 이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받고도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니 말이다.
사실 처남은 이 방면에 있어서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국내의 최고 인재들만 간다는 이공계대학의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화이트해커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국내 해킹대회는 물론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해킹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굵직굵직한 해킹 사건이 터질 때마다 텔레비전에 나와 수사 상황을 브리핑하는 사이버수사 책임자이다.
때문에 소울이는 외삼촌이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으며, 평소에도 아빠 말보다 외삼촌의 말을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
처남과의 통화 이후에도 나는 칼럼을 쓰는 시간 외엔 단풍이야기에 접속해 보라매날다의 동정을 살피는 데 시간을 거의 다 허비했다. 240레벨 이상만 갈 수 있는 장소를 드나들던 보라매날다는 이제 250레벨 이상만 갈 수 있는 장소에 주로 머물러 있다.
240레벨을 겨우 달성한 나의 게임 캐릭터가 갈 수 없는 곳이다. 보라매날다는 가끔씩 그 장소에서 이탈해 ‘무릉도원’이나 ‘루디브리엄’ 같은 곳을 드나들기도 했다. 그런 곳들은 보라매날다와 같은 고레벨의 캐릭터들이 갈 이유가 없는 장소이다.
자꾸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치우쳐서인지 몰라도 그 장소들은 예전에 소울이와 내가 함께 퀘스트를 하며 몬스터들을 사냥하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또 하나 수상쩍었던 점은 보라매날다가 단풍이야기에 머무는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 때문인지 보라매날다는 로그인한 지 한 시간 정도만 되면 게임 속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다 몇 시간 후 확인해보면 언제 또 다시 접속한 건지 온라인 친구 찾기 항목에 나타났다가 한 시간 정도 후 다시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 같은 행동을 놓고 내가 수상쩍다고 한 것은 나와 소울이의 예전 약속 때문이다. 소울이와 내가 한창 ‘단풍이야기’를 즐겨할 때 나는 소울이가 초등학생인 점을 감안해 한 시간 이상 연속으로 게임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게 내가 소울이와 게임을 함께하는 조건이었다.
“달달아, 정말 이상하지 않아? 왜 이 녀석은 소울이를 이처럼 속속들이 잘 알고 따라하는 걸까. 이것도 나만의 착각일까?”
하소연할 데라곤 안방의 내 책상으로 옮겨온 사육통 속의 달달이밖에 없다. 물론 달달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어제 내가 당근을 먹이로 준 탓에 천천히 가래떡 뽑아내듯 싸고 있는 주황색의 배설물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