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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규 Oct 15. 2024

부재를 알리는 신호음

새가 떠난 후 내 삶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버렸다. 마치 아이가 갖고 놀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실타래처럼……. 아니, 실타래라면 차라리 낫다. 엉킨 매듭을 찾아내 풀거나, 정 풀리지 않을 경우 끊어버리고 다시 이어서 쓰면 되니까. 하지만 엉켜버린 내 삶에는 매듭이 없다.

 

매듭이 없다는 건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게 아닌가.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지만, 지금의 내 삶은 세상 아무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단절의 끝 그 자체다.


바로 그때 아직도 그대로 있을지도 모를 매듭 하나가 생각난다. 나는 휴대폰의 키패드에서 단축번호 2를 길게 누른다. 그러자 액정 화면에 ‘아들’라는 글자가 뜨면서 신호 가는 소리가 들린다. 신호가 가는 걸 보니 아직 해지되지 않은 것 같다. 혹시 소울이가 받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이 막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들려온 것은 바로 단절 그 자체의 소리다. 뚜뚜뚜뚜뚜…….


그 소리를 들으니 지금도 막막한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보이저 호가 불현듯 떠오른다. 45년 전에 지구를 떠난 보이저 호는 현재 인간이 만든 물건 중 가장 먼 우주를 항해하고 있다. 그래봤자 지구에서 빛으로 고작 2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가고 있을 뿐이지만.

 

인류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가 지구를 중심으로 반경 465억 광년이니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먼지 한 톨 정도의 거리만큼 이동한 셈이다. 그런데 보이저호는 태양계의 끝을 벗어나 다른 항성의 공간으로 접어들 때 이상한 소리를 지구로 보내왔다.


사람의 비명과 개의 울부짖음이 합쳐진 듯한 괴이한 소리를 송신해왔던 것. 성간 공간에서의 플라즈마 진동 때문에 발생한 소리라고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마치 태양계의 끝을 알리는 신호처럼 여겨졌다.

 

소울이 휴대폰의 신호음에서 왜 그 소리가 연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소울이와 보이저호의 미래가 닮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태양계에서 벗어난 보이저호는 원자로의 동력이 완전히 끊어지면 우리은하의 중심을 한없이 빙빙 맴돌게 된다. 10억 년 후에도, 아니 지구가 사라진 후에도 영원히……. 그때쯤이면 소울이의 몸을 구성했던 원자 알맹이 하나하나도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영원히 맴돌게 된다. 나도 언젠가는 동참하겠지만 그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없더라도 슬퍼하지 않기 바란다.

  

배터리가 다 된 건지, 아니면 이미 해지가 된 건지는 그 소리만으로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건 이승에서의 부재를 알리는 소울이의 마지막 신호일지도 모른다.


소울이와의 영원한 이별엔 까다로운 절차가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우두커니 있다 간간이 찾아오는 조문객들에 대한 응대, 입관, 발인, 화장, 그리고 납골당에 유골을 안치하기까지 나는 슬픔을 수없이 들이마셨다 뱉어내곤 했다.

 

평소엔 번거롭다고 생각했던 그 절차들이 그렇게 고마운 건지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슬픔이 목젖까지 차올라 숨을 쉬기조차 힘들 때마다 그 번거로운 절차들이 겨우 숨을 내뱉을 수 있게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 모든 장례 절차와 자잘한 사후 처리는 나 대신 소울이의 외삼촌인 처남이 도맡아 해주었다. 꼼꼼한 처남이 소울이의 휴대폰까지 해지시켰는지는 알 수 없다. 덕분에 나는 지금 소울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끝의 소리에 나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앞으로도 계속 전화를 걸면 그 소리나마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이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십시오’ 따위의 절망적인 멘트는 듣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그 번거로운 장례 절차도 내 슬픔의 찌꺼기를 몽땅 걸러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지금의 슬픔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들다.


아이의 시신을 확인하고 난 후 일사천리로 진행된 장례식 때의 슬픔이 하염없이 위로 솟구치는 화산 폭발 같은 것이라면, 지금의 슬픔은 마치 멸치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촘촘한 그물망 같다. 화산 같은 슬픔은 분출될 곳이라도 있지만 사방에서 조여 오는 그물망의 슬픔은 빠져나갈 틈이 전혀 없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슬픔의 그물망에 갇혀 질식사할 판이다.


나는 그물망에서 손가락 하나라도 빼낼 수 있는 또 다른 매듭을 찾아보기로 한다. 이미 컴컴해진 소울이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 형광등 스위치를 켠다. 주인을 잃은 방은 창백한 형광등 불빛만큼이나 휑하다.


나는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때문에 내 방에는 무엇이든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을 간직하고 있다. 사실 모든 물건에는 당시의 추억들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추억이 서려 있는 물건들은 따로 보관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추억에 대해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만큼 난감한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런 난감함에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나는 가급적 실용성 위주로 물건의 폐기 여부를 결정한다.


나를 닮아서인지 몰라도 소울이는 평소 정리정돈을 잘 하는 편이다. 소울이의 오아시스 위편에는 만화책과 필독도서들이, 아래편에는 참고서와 문제집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꽂혀 있다. 모루 위에는 초롱이와 해리포터, 그리고 사전과 노트 등을 꽂아둔 자그마한 책꽂이 하나가 놓여 있다.


앙드레를 열어 보니 사고가 나던 날 교복으로 갈아입을 때 벗어두고 간 추리닝 바지와 라운드 티셔츠가 잘 개어져 아래쪽에 단정히 놓여 있다. 마치 지금이라도 금방 집으로 뛰어 들어와 갈아입기라도 할 것처럼.


소울이에겐 특별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자기가 아끼는 물건에 별명을 붙여 사용했는데 책장은 오아시스, 책상은 모루, 스탠드는 초롱이, 컴퓨터는 해리포터, 옷장은 앙드레로 불렀다. 나한테 말을 할 때도 앙드레에서 하얀 후드티를 가져다 달라든지, 아니면 모루의 한쪽 다리에 나사가 빠졌으니 해리포터를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식이었다. 소울이가 있을 때는 그렇게 헷갈렸던 물건의 별명들이 이제는 왜 이렇게 잘 기억되는 걸까.

 

모루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패 모양의 트로피가 눈에 띈다. 뒤에 칼 두 개가 꽂혀 있는 이 트로피는 소울이가 지난겨울에 개최된 주니어 해킹방어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받아온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와 함께 간 서점에서 우연히 해킹 관련 책을 읽고 코딩에 관심을 갖게 된 소울이는 유튜브 등의 무료 강의를 들으며 독학으로 코딩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동호인 모임을 통해 실력을 쌓으면서 정부기관이나 대학에서 개최하는 해킹방어대회는 물론 국제대회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책상 서랍 속에는 필통과 포스터컬러 물감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나는 맨 밑의 서랍에서 장지갑과 예금통장을 꺼내본다. 예금주란에 적혀 있는 민소울이라는 글자를 보며 난 왜 이런 통장을 하나밖에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에 휩싸인다.


소울이가 갖고 싶어 하던 최신형 아이패드도 사주고, 갖고 싶어하던 만화 시리즈도 몽땅 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아이가 남긴 추억의 흔적을 좀 더 풍성하게 더듬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소울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소유했던 물건들이 고작 이것들밖에 없었는가 하는 안쓰러움에 다시 명치끝이 아프도록 저려온다.

 

내가 용돈을 보관하라고 준 장지갑 속을 살펴보니 스크래치가 벗겨진 문화상품권 3장만 달랑 들어 있다. 이상한 생각에 장지갑의 이곳저곳을 뒤져보니 신분증을 꽂는 칸에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쪽지가 있다.


‘SOULMIN / A1S2D3F4@’.

 

쪽지에 적힌 기호를 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단풍이야기’의 아이디와 비밀번호임을 알아차린다. 단풍이야기는 소울이가 초등학교 때 즐겨하던 온라인 게임으로서, 나도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임이다. 당시엔 소울이와 함께 공휴일 같은 날 하루 종일 단풍이야기를 하며 보낸 적도 있다.

 

소울이는 다른 온라인 게임도 내게 가르쳐 주었지만, 난 게임 방법이 비교적 수월한 단풍이야기밖에 배우지 못했다.

 

내가 키우던 캐릭터는 칼을 쓰는 전사였고, 소울이는 마법사와 궁수의 두 캐릭터를 함께 키웠다. 난 레벨을 올리는 것보다 게임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줍기에 더 열을 올리곤 했는데, 한번은 그동안 수집한 아이템을 팔아 꽤 많은 수입을 올리자 소울이는 마치 자기 일인 양 좋아했다.


과거에 대한 추억의 시작은 이처럼 언제나 행복한 기억에서 비롯되곤 한다. 그러나 그 행복한 순간을 한참 더듬다 보면 마치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리는 것처럼 그와 연관된 나쁜 기억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소울이가 우리 아파트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누워 있을 때 소울이의 해리포터에 켜져 있었던 화면이 바로 단풍이야기다.

 

난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 중의 하나가 그것이다. 소울이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더 정확히는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이후 단풍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캐릭터의 레벨을 높일 만큼 높여 흥미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제 또래들이 즐기는 다른 게임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왜 하필 단풍이야기를 켜놓은 채 그런 선택을 한 걸까.


난 지금도 마지막 날의 상황을 또렷이 기억한다. 소울이가 짓던 작은 표정 하나조차도.

 

그날 소울이가 평소와 달랐던 점이 있다면 학교에 갔다가 5분도 채 안 돼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집필실로 사용하고 있는 집 근처의 오피스텔에 가기 위해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소울이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왜 그래?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어?”


“아니, 휴대폰을 놓고 온 줄 알았는데 여기 안주머니에 있잖아.”


소울이는 자기도 머쓱한지 씩 웃었다. 분명 그 표정엔 고민이나 어두운 그림자가 끼어 있지 않았다. 아무리 관상을 잘 보는 족집게 도사라 할지라도 잠시 후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거라곤 상상조차 못할 만큼 평상시와 다름없는 표정과 말투였다.


“뭐해? 어서 가지 않고서는. 그러다 학교 늦겠다.”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닥 발걸음을 옮기던 소울이가 다시 화장실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근데, 아빠.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오늘 메뉴는 네 똥꼬 구이다.”


“에이, 뭐야. 또 말 안 해주고.”


“야, 인마. 아빠가 주는 대로 먹으면 되지.”


언제부터인지 소울이는 식사 메뉴를 묻는 버릇이 있었다. 밤늦게는 내일 아침 메뉴가 뭐냐고 물어보고, 학교에 다녀와서는 곧장 오늘 저녁 메뉴가 뭐냐고 물어보는 게 인사였다. 한창 많이 먹을 때라서 그런 거겠지만 좀 유별나긴 했다.


나 혼자 온라인으로 장을 보고 식사 준비를 해야 하기에, 사실 일주일치 식단은 항상 미리 짜놓는 편이다. 그럼에도 그날 난 소울이의 질문에 결국 답을 해주지 않았다.

 

내가 적어놓은 식단 메모를 뒤적여야 하는 게 멋쩍기도 했거니와 그런 대화를 길게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마음 속 깊이 박혀 있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중년의 남자가 매일 밥상을 차리기 위해 식단을 짜고 부엌에서 서투른 칼질을 해야 하는 데 따르는 거부감이 상당했으니까. 그 같은 거부감은 아내의 빈자리에 대한 그리움과 비례해 점점 커졌다.


그날 소울이는 먹지도 않을 저녁 메뉴가 왜 궁금했을까.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소울이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던 걸까. 그렇다면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걸까. 도대체 왜, 왜, 왜?

 

온통 물음표만으로 가득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소울이 책상 위의 컴퓨터 전원을 켠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의 아래쪽에 있는 단풍이야기의 아이콘을 누른 후 종이쪽지 속의 소울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 버튼을 누른다. 게임을 실행시키면서도 나는 왜 그날 저녁메뉴를 소울이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 게임 실행 로딩 표시가 끝난 후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것은 전혀 뜻밖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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