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8분 30초 전 우리은하 변두리의 한 늙은 별에서 출발한 빛이 거실의 남향 창으로 파고든다. 그 빛 중에서 고작 400~700나노미터 파장에 속한 일곱 가지의 색만 감지할 수 있는 내 눈에 이젠 그중에서도 가장 파장이 긴 붉은색 빛만 비칠 뿐이다. 노을이다.
늦은 오후다.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앉아 있던 터라 정확한 시간은 가늠할 수 없다. 얼굴을 비추던 저녁놀이 이내 소파에 걸터앉은 내 발 밑자락까지 붉게 물들인다.
저녁놀의 부드러운 애무는 곧 그친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마주보이는 서쪽 방향의 104동 건물에 해가 가려졌기 때문이다. 우리 동과 비스듬히 마주보며 서 있는 그 동 때문에 우리 집은 늘 해가 빨리 지는 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줄어드는 햇빛의 입자들에 반비례해 어슬어슬 늘어나는 땅거미 속에서 난 무력하게 계속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루에 해가 두 번이나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어린왕자가 산다는 소행성 B612 같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바로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가 두 번 지는 게 아니라 두 번의 저녁놀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지구를 비추는 해는 하나일 뿐이고, 어린왕자가 사는 소행성처럼 의자를 조금만 옮겨도 몇 번이고 해가 지는 것을 따라다닐 수 있을 만큼 지구는 그리 작은 행성이 아니니까…….
사라졌다가 기적처럼 다시 집 안으로 스며든 저녁놀은 좀 전의 거실 창이 아니라 반대쪽 북향의 주방으로 난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잘 익은 밀감 빛의 저녁놀을 바라보다 난 소파에서 슬며시 일어난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어떻게 북향의 창으로 스며들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두 번의 저녁놀을 만들어내는 광원은 주방의 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63빌딩이다. 104동 너머로 사라진 서녘의 햇살이 63빌딩의 도금된 특수 유리창에 반사돼 주방의 창으로 거침없이 스며들고 있다.
직선거리로 3.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여의도의 63빌딩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여기까지 비치다니……. 더구나 반사되는 그 건물 너비의 정확한 각도 내에 우리 집이 위치해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우리 집에선 그동안 매일 이렇게 해가 두 번 진 것인지, 아니면 기울어지는 해의 각도가 63빌딩의 반사되는 유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일 년 중의 며칠만 이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이렇게 반사되는 빛을 두고 또 하나의 저녁놀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냥 이것마저 우리 집에서 바라보는 두 번째의 저녁놀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왜냐하면 두 번째로 스러지는 그 밀감 빛의 농익은 저녁놀이 너무나 황홀했으므로.
사실 어린왕자가 사는 소행성 B612에선 노을이라는 현상이 생길 수 없다. 노을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으로부터 출발한 빛이 행성에 있는 대기 중의 공기 분자 같은 입자와 부딪히는 산란 현상으로 인해 생긴다.
지구를 예로 들면 새벽이나 저녁 무렵에는 태양의 고도가 낮아져 통과해야 하는 대기층이 길어짐에 따라 파장이 길고 산란하는 각도가 큰 붉은색 빛만 많이 남아 태양 방향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인다. 즉, 행성의 하늘이 빨갛게 보이기 위해선 이처럼 대기 입자로 인한 빛의 산란 현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자를 조금 옮기기만 해도 노을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는 소행성 B612 같은 작은 천체에는 그 같은 산란 현상을 일으킬 만한 대기가 없다. 천체가 대기를 붙들어둘 만한 중력을 지니기 위해선 웬만한 질량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달에 대기가 없는 이유도 질량이 지구의 약 팔십분의 일에 불과해서다. 따라서 대기가 전혀 없는 달에서는 산란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 하늘이 항상 검다.
소설을 가지고 굳이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사실이 그렇다는 거다. 어쨌든 63빌딩에 반사된 두 번째 저녁놀도 어린왕자가 의자를 옮겨가며 마흔네 번이나 감상했다는 석양빛만큼이나 아름다운 건 사실이다.
그 자리에 선 채 저녁놀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식탁 옆의 벽에 걸린 액자로 눈길이 간다. 액자는 노을빛을 받아 마치 조명을 켠 것처럼 환하게 반짝인다. 액자의 사진 속에서 소울이도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미소를 보니 다시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온다. 그리움이 낳는 통증의 언저리에는 으레 설탕 같은 달콤함이 조금이나마 묻어 있곤 하지만, 요즘 내게 불쑥불쑥 달려드는 녀석에겐 그런 게 전혀 없다. 슬픔이 주는 달콤함이란 약간의 배려도 없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아픔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액자 속의 가족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우린 셋이었는데, 왜 지금 이 자리엔 나만 홀로 서 있는 것일까.
소파로 돌아가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켠다. 스멀스멀 기어드는 어둠과 함께 온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적막이 너무 싫어서다.
“전남 진도 하조도와 나배도를 연결하는 나배대교가 착공 5년여 만에 개통됐습니다. 총연장 1킬로미터, 폭 10.4미터의 왕복 2차로 규모인 나배대교는 진도 지역의 네 번째 해상교량이자 조도면에서는 상조도와 하조도를 잇는 조도대교 다음으로 지어진 두 번째 해상교량입니다. 나배도 주민들은 다리 개통 전 하루 2회 여객선으로 조도면을 다녔지만, 이번 개통으로 차량을 통해 이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섬들이 새 떼처럼 많다는 뜻에서 유래한 조도면은 전국의 읍․면 중 가장 많은 178개의 유․무인도로 이뤄져 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은 푸른 바다 위로 높이 솟은 2개의 주탑과 그 사이로 연결된 나배대교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또 하나의 섬이 사라진 모양이다. 섬의 본질은 고립인데, 다리로 연결되는 순간 그 의미를 잃게 되었으니 말이다. 뭍과 연결되면 섬은 더 이상 꿈꿀 게 없어진다.
텔레비전 속의 기자가 전하는 뉴스를 들으니 나배도의 경우 좀 특이하긴 하다. 나배대교는 하조도라는 섬과 연결된 다리이며, 하조도는 다시 조도대교를 통해 상조도와 연결된다. 즉, 나배도는 직접 뭍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섬과, 그리고 거기를 통해 또 다른 섬과 연결될 뿐이다.
그래도 사방이 온통 파도 소리에 막혀 철저히 고립되어 있을 때만이 섬으로서의 편안함과 아늑함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언제든 다른 섬으로 오갈 수 있다면 그 섬은 이미 섬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내가 그렇게 된 이후 나는 서서히 섬이 되어 갔다. 그것도 주위가 온통 절벽으로 둘러싸여 그 누구도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절해고도였다. 하루 종일 들리는 소리라곤 절벽에 와서 부딪치는 파도 소리뿐인 외로운 섬이 바로 나였다.
소울이는 그 섬에 서식하는 단 한 마리의 새였다. 사방으로 막힌 섬으로부터 훌쩍 날아서 학교와 학원을 오가고, 또 그렇게 훌쩍 날아서 항상 정확한 시간에 섬의 품으로 날아들던 자그마한 새.
그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섬은 파도가 매일 씻겨내는 선명한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었다. 새가 있는 섬과 새가 살지 않는 섬의 차이는 희망과 절망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크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새가 지저귀지 않는다는 걸 섬은 알지 못했다. 그걸 눈치 챘을 때는 새가 이미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날아간 뒤였다.